“우린 죽었다 생각하고 다신 北에 돌아오지 마세요”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규원’./오길남 著, 도서출판세이지刊

“밖으로 나가 어떻게든 식구들을 빼내세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교통사고로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혜원이와 규원이는 어려서 이 사회에 적응을 할 거예요. 당신이 만약 내 말을 흘려듣고 공작원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면 우리는 정말이지 구제 받을 수 없어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돌아오지 마세요.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더럽게 살지 마세요.”


북한에 자진 입북해 대남 방송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오길남 박사의 아내 신숙자 씨가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마지막으로 던진 절규 섞인 한 마디였다.


오길남 박사는 1969년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하지만 유학 시절 반(反)정부 활동으로 국내 입국이 어려워지게 되고, 때 마침 북한에서 경제학의 ‘대가’로서 대우해준다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일가족을 이끌고 자진입북했다.


입북 후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낀 그는 다시 북한을 단독 탈출, 오랜 기간 독일에서 가족 구출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1992년 한국에 입국한다. 그리고는 1993년 아내와 딸들의 구명을 위해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을 써냈다. 하지만 이 책은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절판됐다.


이 책은 지난 6월 북한인권운동가 김미영 씨에 의해 ‘잃어버힌 딸들, 오! 혜원규원'(도서출판 세이지 刊) 이름으로 재출간 됐다.


김 씨는 편집자 서문에서 “10년 전 오 박사를 인터뷰 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그는 느닷없이 가족들의 사진을 맡겼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어 없어져도 혜원, 규원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위해 뭔가 말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오길남 박사의 사연은 한국판 파우스트”라면서 재출간 이유를 밝혔다.


오 박사는 이 책을 통해 북한 공작원들의 회유에 쉽게 속아 넘어간 자신의 과오와 가족들을 이끌고 자진 입북한 후 홀로 탈북 했다는 사실에 대해 자책하는 모습을 거듭 보이고 있다.


그는 “못난 아빠를 따라 동토의 땅에까지 따라갔다가 볼모로 잡혀있는 내 아내와 두 딸. 못난 지아비의 피맺힌 절규 대신인지, 내 눈에서는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리석었다. (북에서) 내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위장된 구국의 소리 앵무새 방송 요원이었다. 북한은 사이비 종교의 광신적인 집단이나 다름 없었다”라면서 어리석었고 아둔했던 자신에게 자조 섞인 말을 던진다.


책의 후반부에는 윤이상의 집요한 재입북 권유를 거절하는 오 박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윤이상은 오 박사 탈출 후 그와 수차례 만나면서 ‘조작’과 ‘강압’이 의심되는 오 박사 아내의 편지와 음성 테이프를 건넨다. 이 같은 윤이상의 집요한 재입북 권유는 오 박사가 대남방송 공작요원으로서 대외비를 소지한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윤이상은 “오 박사, 당신은 경망된 짓을 했다. 그런 짓을 안 했다면 좋은 직장에 갔을텐데. 당신을 계속 대남 방송요원으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당신의 잘못을 관용으로 용서할 의향이 있다고 했소. 가족을 생각해서 평양으로 돌아가시오”라는 설득을 반복한다.


오 박사가 그런 윤이상의 제의를 거절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재입북을 하겠다는 말을 하면 윤이상은 “이 친구가 뭘 알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군. 당장 나가라”며 호통을 친다.


그러면서 “왜 북을 욕하고 다니는 것이오. 통일운동을 훼방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아시오”라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컴퓨터 사이언스를 4~5년 독일에서 공부해 대가가 된 다음에 평양의 가족에게 돌아가시오. 조국은 그동안 가족을 칙사 대접으로 모실 것이오”라면서 회유하기도 했다.


오 박사는 이 같이 집요하게 입북을 권유했던 윤이상에 대해 “북은 윤이상을 대남 공작 책략 일환으로 이용했던 것”이라면서 “정작 그것을 모르는 것은 윤이상 당사자 뿐이었다. 그는 북한 인민들의 분노를 감지할 수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북한의 떠받듦에 감격해 눈 뜬 장님이 됐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김미영 씨가 이끄는 북한인권단체 세이지코리아는 책의 출간과 함께 오길남 박사의 두 딸인 혜원·규원 자매 구출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세이지코리아 측은 지난달 28일 보도자료를 통해 “‘혜원·규원 구출 UN 청원운동’은 유엔 차원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문제를 다루도록 청원하는 운동으로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를 이용할 것”이라면서 “국내 차원을 넘어 영어·중국어·스페인어·불어·아랍어 등의 사용자들과 연대해 세계시민의 양심을 일깨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단체는 “‘혜원-규원’이라는 실명을 땄지만 실제로는 15만명 이상의 무고한 정치범 수용소 재소자를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면서 “21세기의 수치인 북한 정치범수용소를 해체시키는 데 기폭제 역할을 담당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세이지코리아 양진아 씨는 데일리NK와 통화에서 “SNS를 통해 1억 명에게 서명을 받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 “1억 명이 모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산하 인권 기구와 접촉해 본격적으로 혜원·규원이를 비롯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을 위한 구명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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