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자(孫子)는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지적했다. 그리고 “적의 실정을 모른 채 아군의 전력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전쟁에서 ‘적의 실정(實情)’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역사를 보면 ‘적의 실정’ 파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수년간 적의 침략에 의해 전국토가 황폐화 되고 국민이 막대한 인적·경제적 손실을 입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6.25전쟁 사례만을 보더라도 우리 국가가 얼마나 대외 정세에 어둡고 안보의식이 약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현재의 대외 정세 인식과 안보의식이 그 때에 비해 특별히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먼저 임진왜란 발발 전후의 사정을 보면, 조선 정부가 선조 23년인 1590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으나 그 이듬해 귀국한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에 대해 엇갈린 보고를 했다. 통신사 일행 중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情形)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처럼 상반된 보고에 접해 실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을 회피하고 ‘희망적 사고’에 의존해 김성일의 보고로 기울었다. 그리고 각 도에 명하여 축성(築城) 등 전쟁에 대비하여 방비(防備)를 서두르는 것조차 중지토록 했다.


심지어 선위사 오억령이 조선에 머물고 있던 겐소 등에게서 일본이 명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렸으나 도리어 파직당했다. 그 결과 임진년인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입했을 때 수많은 백성들이 무참히 살육(殺戮)되었고, 7년간의 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정확한 피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전 인구의 1/4~1/3 정도가 살상되었고 경제가 100년 후퇴했다는 분석도 있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적의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생명이 매우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후에도 일본의 정세 파악에 대한 노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결국 20세기 초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외부 정세에 무지한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식 인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약 6개월 전인 1949년 12월 27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박정희, 김종필, 이영근 주도 하에 연말 종합보고를 작성,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관해 상세한 보고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보고는 당시 정부와 군 수뇌부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북한군 공격 15일전인 1950년 6월 10일 전격 단행된 인사이동으로 전방 사단장과 육본 지휘부 대부분이 교체되어 전쟁 발발 당시 이들은 자기부대 장악과 임무 파악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3일 24시에 한국군은 6월 11일 16시부터 유지되던 비상경계명령인 ‘작전명령 제78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약 1/3에 달하는 병사들이 24일 새벽(토요일)부터 휴가와 외출을 떠나 막사를 벗어나 있었다. 결국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했을 때 한국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한국군 수뇌부 일부는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말로 실상과 괴리된 대북 우월감을 유포시켰다. 전쟁 발발 직후 국회에 출석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만약 공세를 취한다면 1주일 이내에 평양을 탈환할 자신이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 같은 호언장담은 한국군의 실제 전쟁수행능력과 현격하게 괴리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정부와 군 수뇌부가 ‘적의 실정’과 ‘아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국가안보가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현재의 한국은 1950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향상된 대북 정보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북한의 공격능력과 체제의 운영 방식에 대해 매우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침몰한 후 정부는 한참 동안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 결과 북한의 어뢰 공격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에 대해 정부 고위당국자가 “그것은 억측이 아닌가 한다. 배가 인양돼서 실물을 보면 많이 다를 것”이라고 부인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동년 4월 초에만 해도 국방부는 천안함 침몰을 전후해 북측 비파곶에서 상어급(300t급) 잠수함 2대가 기동했다고 발표했으나, 5월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천안함 공격에 연어급(130t급) 잠수정이 운영됐을 것으로 분석됐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우리 정부가 북한의 공격능력과 장비에 대해 매우 제한된 정보력과 대처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8월 14일 김정일의 뇌혈관계 이상 이후 한·미 군사당국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유엔군의 일원으로 ‘북한 자유화 프로그램’에 참여해 평양 등 북한 주요도시 점령, 북한 인민군 무장해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임시구호와 필수적인 공공서비스 제공 등 민사(民事)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작계 5029’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6·25전쟁 발발 전 한국군 수뇌부 일부가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말하면서 한국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북한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던 것처럼, 북한체제의 내구력과 북한군의 저항능력 및 억지력에 대해 실상과 괴리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 3년간의 연속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대량탈북사태가 발생했지만, 당시 한국군과 미군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앞으로 다시 그와 같은 대량 기아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지 않지만, 그 같은 사태가 재연된다고 해도 북한군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과 수도권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장사정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미군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작계 5029’가 상정하고 있는 ‘전쟁 이외의 상황에 대한 군사적 개입’ 논리는 가난하고 무장력이 약한 제3세계의 일부 국가에는 몰라도 초군사화된 국가인 북한에는 적용 불가능한 것이다.
 
한·미의 북한 급변사태론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한 전문가는 아마도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일 것이다. 황 전 비서는 “일부 사람은 북한의 독재체제가 붕괴하면 큰 혼란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데 궤변 중에서도 최고의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김정일이 사망하더라도 김정일의 측근들이 이미 다 구축되어 있고 한배를 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내란 또는 무정부 상태로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내의 다수 전문가들은 김정일을 북한체제와 동일시하는 협애(狹隘)한 시각으로 북한을 바라보면서 김정일이 사망하면 북한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희망적 전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북한의 절대 권력자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김정일 주변에 북한을 이끌어가는 핵심 엘리트 그룹이 있고, 당과 군대, 공안기관이 엘리트와 주민을 확고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에도 불구하고 황 전 비서가 전망한 것처럼 북한에서 ‘급변사태’는커녕 의미 있는 정치적 혼란의 징후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 독재체제의 생존 및 공격능력에 대한 실상과 괴리된 과소평가 못지않게 우리의 대북 인식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문제점은 북한의 권력체계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상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의 대외용 문건인 헌법에 의거해 북한 국방위원회를 ‘최고권력기구’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5대 주요 권력기관 중 당의 최고지도기관인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를 가장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국가기구인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을 호명하고 있다. 국방위원회는 국가기구 중에서는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당중앙위원회나 당중앙군사위원회에 비해서는 낮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주요 정책결정이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황 전 비서의 증언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국방위원회 위원 중 당중앙위원회 비서직을 겸직하고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국방위원회에는 북한군을 지휘하는 김정은 최고사령관도, 김정은의 지시 하에 군령권을 행사하는 리영호 군 총참모장도, 당중앙군사위원직을 겸직하고 있는 육해공군 사령관 중 어느 누구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 발간 『국방백서』의 ‘북한 군사지휘기구도’는 대외용 문건인 북한의 헌법에 근거해 마치 국방위원회가 북한군 전반을 지휘하고 있는 것처럼 실상과 괴리되게 묘사하고 있다.
 
과거 김정일의 군대에 대한 현지지도는 국방위원장 자격이 아니라 항상 최고사령관 명의로 이루어졌고, 현재 김정은의 군대에 대한 현지지도도 최고사령관 명의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군대에 대한 영도체계(영군체계)와 관련 ‘최고사령관의 유일적 영군체계’를 강조해왔지, ‘국방위원장의 유일적 영군체계’를 강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하면 북한과 싸워야 하는 대한민국 국방부조차 북한의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한다는 헌법상의 문구를 순진하게 받아들여 국방위원회가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서의 시대착오적인 3대 권력세습의 진행과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판단능력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2010년 9월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 개최 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의 대외적인 선전에 동조하여 김정은의 후계자 지명 사실을 ‘오보’나 ‘소설’로 간주했다. 그리고 당대표자회 개최 직전까지 국내외의 대다수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 진전 상황을 과소평가하여 김정은이 당대표자회에서 공식 등장할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상을 뒤엎고 김정은은 당대표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해 북한체제의 제2인자임을 과시했다.
 
김정일의 사망 후 김정은이 곧바로 북한의 실질적인 제1인자로 자리 잡았지만, 국제사회와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김정은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하거나 마치 ‘섭정’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북한 실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에 의거하여 북한 권력승계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은의 ‘나이’와 ‘경험’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만을 가지고 상황을 이해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는 북한체제의 ‘군주제적 스탈린주의체제’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등 대북 인식에서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데일리NK 칼럼을 통해 이 같은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고, ‘남한중심적 시각’이나 ‘북한중심적 시각’ 또는 ‘희망적 사고’를 넘어 북한정치와 권력의 실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대북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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