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고 온 처자식 때문에 역사의 진실을 여러분 앞에 더 밝히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측 경호원 출신으로 수기「북한 요지경」을 펴낸 탈북자 호혜일(가명.2005년 입국)씨는 본인의 신상에 관한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뒷모습만이라도 찍자는 기자의 부탁에도 도저히 안 되겠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한다.
북한 지도층의 핵심 정보에 접근해 있었던 그였던 만큼 말 하나 하나에도 조심성이 묻어나온다. 그럼에도 북한 체제의 실상을 폭로한 책을 펴내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최소한의 진실만이라도 남한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 씨는 평양에 있는 북한 최고의 명문대학 두 곳을 졸업하고 군부와 사회의 중요한 직장에서 근무했었다. 중국과 러시아에 나가 북한 무역 대표단 성원으로도 활동했다. 북한의 엘리트 계층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자유민주사회를 동경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아 남쪽행을 결심하게 됐다.
‘김정일의 전속 무속인이 있었다’, ‘북한 해군이 연평해전 당시 연유탱크에 있던 기름을 내다 팔아 적시에 출동하지 못했다’
그가 전해주는 북한 권력층의 비화는 하나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들 뿐이다. 북한 체제의 부패와 타락상이 어느 정도이며, 그 근간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호 씨는 지금은 북한의 후계구도 같은 소모적 논란보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북한의 현실을 냉정히 들여다 볼 때라고 충고한다. 태어날 때부터 수령절대주의 사상에 세뇌당해 온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이윽고 그는 “더 이상 북한의 무고한 백성들이 세뇌의 만세 속에 굶어죽게 할 순 없다. 굶어죽고, 맞아죽고, 얼어 죽고, 부관참시까지 되는 저 북한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무거운 입을 뗐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차마 믿을 수 없는, 차라리 믿고 싶지 않는 그런 소설 같은 일들이었다.
– 북한을 ‘요지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뭔가
북한은 남한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알다가도 모를 사회이기 때문에 ‘북한 요지경’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숱한 사람들이 굶주리고 독재속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북한이란 사회는 여태껏 이상하리만큼 잘 굴러가고 있다. 몇 십만, 몇 백만 명이 아리랑(집단 체조)에 나서고, 굶어 죽으면서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치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 북한 엘리트들이 북한 체제에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외부세계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더 이상 북한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텐데.
먼저 엘리트들에 어떤 부류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엘리트 계층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은데, 하나는 기술과 지식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좋은 토대를 기반으로 기득권을 가지게 된 부류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정계, 권력기관, 법 기관 종사하면서 북한 체제 수호 제 1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北 엘리트, 김정일과 운명 공동체
두 번째 부류는 출신이나 토대가 썩 좋지는 않지만 지식과 기술, 두뇌로 사회유지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이다.
첫째 부류는 이미 무너져버린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과정을 지켜보며 이 사회가 무너지면 자기들의 인생도 끝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지나온 과거사도 역사 앞에 ‘총화'(전체적인 비판) 받아야 한다는 공포감 때문에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즉 김정일과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그들도 자본주의 중심의 통일이 이뤄지고 난 후에 자신의 죄과는 치루더라도 전범자같이 사형을 당하거나 3대가 멸족되지는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모의 토대 위에서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산 사람들인지라,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실업자가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소련의 경우가 그걸 말해준다.
두 번째 부류는 영리한 사람들로 대부분은 기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 아니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의 뿌리를 쉽게 벗어버릴 수 없다. 그 사회에서 기반이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현실 앞에 순응하면서 보신적(자기 보호)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 이러한 기득권층이 북한 사회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나?
아주 넓게 봐서 북한 전체의 40%라고 보면 된다. 당 일꾼, 보위부, 안전원, 군 지휘간부, 검찰소, 재판소, 내각 산하 기관들, 행정, 경제 기관에 일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35% 정도를 차지하는 중간계층은 과학자, 기술자, 작가, 예술인, 대학교수, 의사 등 지식인 계열과 대학생들이 포함된다. 생활면에서는 하층민과 비슷하지만 체제에 대한 반발심은 적다.
반대계층은 25%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전쟁이나 확 일어나라. 다 무너지고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과거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에 복무했거나 적대계급의 후손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훗날 북한사회에 정치적 이변 발생시 제 1선에 나서 체제의 반대 세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북한 정권은 한반도 유사시 이러한 반대계층을 먼저 척결하기 위한 처형 리스트도 작성해 놓고 있다.
이중 북한 정권은 중간세력에 대한 장악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인텔리에 대한 사상교양 선전사업을 최우선적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더라도 기술이 있기 때문에 먹고 살수는 있는 부류들이다. 언제라도 자본주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더욱 경계하는 것이다.
– 북한 경호원들의 생활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
독신 경호원들은 독방을 쓰는데, 그 침대 밑을 뒤지면 유명 양주가 물병마냥 여기저기 널려있다. 김정일 연회에서 먹다 남은 양주를 경호원들이 나눠 먹는 것이다.
또 연회에서 남는 음식을 땅에 묻는 일만 전담으로 하는 부대도 있다. 장군님이 이렇게 호화스러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면 안 되기 때문에 음식들은 일절 바깥에 내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묻는다.
경호원들은 고난의 행군(90년대 중반 대아사 기간) 시절에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나가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하루 세끼 배불리 먹었으며, 먹는 걸로 고생해 본 적이 없다.
‘군부’라고 표현할 수 없어
– 최근 열차시험운행 취소가 군부의 강력한 반발 때문으로 김정일이 권력누수 현상을 일으킨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김정일 체제 하에 군부의 반발이란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한국의 기준으로 저쪽 사회를 재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 되는거다. 저 사회는 인간의 보편적, 상식적인 자(잣대)를 가지고는 도저히 잴래야 잴 수 없는 억지 사회다. 북한에 ‘군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열차시험운행은 이미 하자고 할 때부터 파탄낼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정부는 북한 사회가 달라진 조짐을 보인다고 해도 무덤덤하고, 일관되게 정책을 펴야 한다. 조짐이 보이는 것은 현상적 얘기일 뿐이다. 북한 정부는 고정불변한 데 반해 한국 정부는 가변적이기 때문에 자꾸 코너에 몰리는 것이다. 저쪽은 그대로 경직되어 있는데 우리가 먼저 오픈 마인드로 나설 필요는 없다.
– 연평해전 당시 군인들이 기름을 팔아 배가 출동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세간에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서해 함대 경비정들과 전투함선들이 출동 명령을 받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해상지역으로 몇 마일정도 출발했을 때 그만 전투함선들의 발동이 꺼지고 말았다. 알고보니 연유탱크에 있던 기름들을 가지고 전투함선 해병들이 술을 바꾸어 먹다보니 그 안에는 기름 대신에 물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투보고를 받고도 전투함선들은 출동 한 번 못해보고 기름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그 사이에 전투는 벌써 끝나버렸다.
사실 지금 북한군들 속에서는 수많은 군수 물자와 군량미를 팔아먹거나 갈취하는 현상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군부에 공급되는 전투장비와 운수기재에 필요한 기름을 팔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 김정일 참가 행사에 폭발물이 3~5개씩 발견됐다는 증언이 책에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반체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건가?
김정일 참가 행사에 폭발물이 나온다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대단한 센세이션이라고 여기겠지만 호위병들 사이에서는 “이번엔 몇 건 나와?” “오늘은 얼마 안나왔어. 두 건 나왔어”라고 말 할 정도다.
용천폭발사고도 김정일을 노리고 폭발물이 설치된 것이었다. 북한 기술로 만들 수 없는 소형폭탄들이 장착돼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테러장비들로 추정된다. 때문에 김정일은 자신의 신변안전 문제에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다.
용천 사고 당시에도 ‘중앙당 서기실 특별서기’라는 직제에 있는 무속인이 두 시간 후에 떠나라고 말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생명을 건진 것이다. 서울 말씨는 쓰는 이 여자가 (김정일에게) 오늘은 이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그쪽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 않는다.(북한은 오래전 제도적으로 무당 등 과거 유습을 모두 없앴으나, 김정일은 일종의 ‘천연기념물 보존 차원’에서 극소수 무당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편집자)
안중근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김정일에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한 사회를 바꾸려면 그 밑바닥부터 봐야 한다. 장군님 만세를 외치는 그 질적 기저의 밑바닥을 흔들어 놔야 한다.
– 마약에 중독돼 있는 북한 주민들이 많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대체 그 실상이 어느 정도인가?
정확하진 않겠지만 5~6%가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저질의 마약 원료를 담배에 섞어 피우는 식이다. 집 앞에 대마초를 키우는 경우도 많다. 신의주, 원산, 남포, 평성, 평양 등에 중독자들이 많다.
신의주에서만도 압록강 호텔이나 갑문여관 앞에 가면 ‘알약’이나 ‘흰가루’를 찾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김정일 지시로 시작된 백도라지(양귀비) 사업은 현재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연계돼 있다.
고위층에서는 마약거래에 관련돼 있는 사람들이 중독돼 있다. 책에도 썼지만 마약관련 사업을 맡고 있는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518군상관리소’(군인상점) 소장도 마약중독자로 공인된 인물로, 회의를 한번 시작하면 50시간 이상 진행하는 바람에 아랫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젊은이들, 이 땅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해야
–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본격화한 이후 체제유지를 위해 믿을 건 군밖에 없는 건 같은데 군의 충성도는 어느 정도인지?
북한군의 충성도는 아직까지 절대적이다. 흥정의 여지가 없고, 흐지부지도 없다. 군대가 허약하다고 하지만 130만 명의 상비군 중에 수령의 총과 폭탄이 되기로 결심한 게릴라들이12~13만 명에 달한다. 아직까지는 이들에는 수령 독재사상 세뇌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 마치 2차대전 이전 히틀러 독일과도 같다. 그래도 히틀러는 주민들을 굶겨죽이지는 않았지만…
– 최근 북한의 후계구도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북한에 있을 때 후계자로 누가 낙점됐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나?
김정일이 생존하는 한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 줄 것이다. 현재로는 김정철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일성은 환갑이 지나서부터 후계자 문제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김정일도 후계 문제에 나설 때다. 자신은 권력의 정통성이 없으니까 북한의 영원한 시조인 김일성의 유훈교시로 우상화에 나설 것이다. 군의 지도층이 30대 중후반~40대 초반으로 교체될 즈음 군부에서 김정철을 본격적으로 후계자로 내세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김정남 쪽을 밀고 있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도 중국의 안전부가 김정남을 보호해줬다(그는 김정남이 스페인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정남에 대한 테러 시도가 있었고 중국 안전부가 경호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김정일 정권 자체도 앞 길을 못 찾는 상황에서 후계구도가 어떻게 되느냐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앞으로 후계구도 자체가 발생조차 하지 않을 상황이 올 수도 있다.
– 마지막으로 데일리NK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만약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당신들 같은 처지라면 나를 북한이 아니고 바로 이 사회에서 낳아주신 부모님들한테 평생 감사해하며 살고 싶은 심정이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잘살고 못살고 독재냐 민주냐를 떠나서 북한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도 모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수하며, 적응하는 것에 오히려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진실인가 묻는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라고 얘기하기 앞서 고향에 두고 온 부모, 처자 때문에 역사의 진실을 여러분 앞에 더 이상 밝히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이 책을 읽는 독자 분들이야말로 북한 주민들에게 더 없는 사랑과 민족애, 통일에 관한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 생각한다. 북한 문제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