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전 중심에 선 한반도…남북관계 향방은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21일 전격 방북, 북한의 2.13합의 이행 의지를 재확인한 데 이어 중국 외교부장이 다음달 2~4일 방북하는 등 주요국의 평양행이 잇따르고 있어 남북관계의 향방이 주목된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조로 장기 미제였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풀고 2.13합의 이행의 문턱을 넘어선 만큼 남북관계에 진 구김살이 펴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먼저 대두되지만 신중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낙관론은 정부가 2.13합의에 사실상 연계하면서 묶여 있던 대북 쌀 차관 선박이 이르면 이번 달 안에 출항하면서 남북관계도 순풍에 돛을 달게 될 것이라는 관측에 기반하고 있다.

정부가 북한 수해 관련 쌀 지원물량 가운데 유보됐던 1만500t을 오는 23일과 25일에 나눠 모두 보내고 2천만달러 가량을 투입해 세계식량계획(WFP)를 통한 식량지원에 나설 계획인 것도 긍정적인 요소로 꼽힌다.

6자회담이 재개돼 가속 페달을 밟을 경우 남북관계도 속도 논란에 휩싸이지 않고 속도를 낼 수 있어 보인다.

납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통한 과거사 정리작업과 평화정착을 위해 필수적인 남북 정상회담도 가시권에 들어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신중론은 왜 나오고 있는 것일까.

우선 주변국들이 방문외교를 통해 평양을 ‘공략’하면서 한반도 정세가 급류를 탈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급류의 중심인 평양과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시각이 그 첫째 이유다.

물론 힐 차관보의 방북이 있기까지 정부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통해 분위기를 띄우고 북한을 설득하는 등 물밑 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동북아 정세를 주도하는 흐름에서 남북관계에는 크게 무게가 실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비쳐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최근 보여진 정부의 대북 접근양태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이란 평가다.

미국을 보면 힐 차관보가 국무부 고위 당국자로서는 5년만에 평양을 방문하고 그에 앞서 1월17~18일 북.미 베를린 회동을 통해 2.13합의를 이끌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이는 작년 11월 미 중간선거 이후의 변화다.

중국은 BDA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의 역할이 여전하며 외교부장을 다음달 2~4일 북한에 보내 북핵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6자회담에서 그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러시아도 BDA 북한 자금을 보내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면서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 우리 정부는 BDA 해법을 모색하면서 한국수출입은행을 송금경로로 쓰는 방안까지 검토했지만 외견상 괄목할 만한 기여를 찾기 힘든 상태다.

정부가 지난해 9월 한미정상회담에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을 구체화하기로 합의한 것이 2.13합의를 낳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현재 정부가 처한 6자 속 위치는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는 지적인 셈이다.

문제는 쌀 차관 제공 문제를 2.13합의 이행 상황에 연계하는 등 6자외교에 주력하면서 그에 따른 여파로 핵심 카드인 남북관계의 공간을 스스로 좁혔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는 작년 말부터 포착된데 이어 올 들어 뚜렷해졌다.

7개월만인 지난 2월말 재개된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정부는 쌀 차관을 논의할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 시기를 2.13합의 초기조치 이행시한(60일) 직후로 잡았고 BDA문제로 2.13합의가 이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열린 경협위에서 쌀 차관 40만t에 합의하면서도 “북한의 2.13합의 이행 여부에 따라 시기와 속도를 조정할 수 있다”며 연계했다.

하지만 2.13합의 이행이 계속 지체되자 합의서에 서명하고 약속한 시기인 5월 하순에 쌀 북송을 시작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지난 1일 끝난 제21차 장관급회담은 쌀 공방 끝에 종결됐다.

정부는 BDA 문제가 해결되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대표단을 초청한 다음에야 뒤늦게 “2.13합의와 쌀 차관은 엄격하게 연계된 것은 아니다”며 쌀 차관 북송 작업을 검토 중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힐 차관보가 방북하고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 계획이 발표된 21일 남북 간에 벌어진 일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북한 해군사령부는 이날 남한의 전함이 북한 영해를 계속 침범하고 있다며 “새로운 제3의 서해해전으로, 나아가 해전의 범위를 벗어난 더 큰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위험한 불찌(불씨)로 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남북 간에 긴장을 조성하는 주장은 이날 평양을 중심으로 벌어진 북.미, 북.중 간의 대화 움직임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이 같은 상황 탓에 정부의 대북정책이 논쟁거리로 비화할 조짐도 있다.

정부가 남북관계와 6자를 통한 북핵외교의 ‘균형적’ 선순환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북핵에 사실상 종속시키는 ‘불균형적’ 선순환에 초점을 맞춘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는 시각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남북관계의 자체 동력인 쌀을 북핵에 연동시킨 뒤 출구를 못찾으면서 기회와 때를 놓치는 전략적 악수를 뒀다는 주장과 평화를 위해 핵문제 해결에 ‘올인’한 것은 정당하다는 입장이 맞서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조선신보가 지난 6일 ‘남측이 제21차 장관급회담에서 대북 식량차관 제공을 유보해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말한 것은 우리측의 실기(失機)와 실기(失期)를 꼬집는 대목이다.

이는 참여정부가 추구한 남북관계의 진전과 북핵 문제의 해결을 병행 추진하는 접근법이 주효한 2005년 당시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 보인다.

당시엔 한국이 정세를 이끌고 만들어가면서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자평한 9.19 공동성명 탄생에 기여했다면 최근에는 쌀 차관에서 볼 수 있듯이 외부 요인에 끌려가고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핵실험이라는 특수상황에 따른 여론의 악화로 정부 대북정책의 폭이 좁아진 것은 불가항력일 수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와 북핵외교의 전략적 균형점을 찾는 지혜를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지난 1일 끝난 남북장관급회담은 수 차례의 다양한 접촉이 있었지만 별 성과를 보지 못했고 당시 합의한 과학기술, 제3국 공동진출 분야의 접촉도 예정대로 열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북측 관심사인 경공업.지하자원 협력 문제도 가격 책정에 이견을 보이면서 25일부터로 잡힌 검덕.룡양.대흥 등 북측 3개 광산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는 물론 27일로 잡힌 원자재 첫 북송 합의도 지키지 못하게 됐다.

이 때문에 쌀 차관이 제공될 경우 남북관계는 상황을 무리 없이 관리하는 수준에서 머물 것으로 보이지만 북측이 계속 냉랭하게 나올 경우 당분간 평화정착이나 신(新)경협 분야 논의가 다소 겉돌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북한이 남한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다 6자회담의 진전 상황과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6자 속에서 나름의 역할공간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예상이 우세한 편이다.

특히 참여정부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가 아직까지 강하다는 점에 비춰 북한이 이에 호응할 경우 남북관계의 정체현상을 극복하는 극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