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30년 전 문서 공개 “북한의 오키나와 침투를 막아라”

“오키나와(沖繩) 침투를 기도하는 북괴의 책동을 완전 봉쇄하기 위해 아국이 먼저 가능한 지역에 한국인 위령탑을 건설해야 한다.”

외교통상부가 30일 일반에 공개한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1970년대 중반 오키나와에 조총련보다 먼저 2차대전 당시 현지에서 희생된 한국인을 위한 위령탑을 건설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 것으로 나타났다.

1974년 초 당시 김동조(金東祚) 외무장관은 주일 대사관에 “북괴가 오키나와에 2차대전 당시 징용.징병으로 희생된 한국인에 대한 위령탑 건설을 기도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긴급 지시한다.

김 장관은 “희생된 망령들을 위로하고 북괴에 기선을 제(압)하여 북괴의 오키나와 침투여지와 구실을 없애고자 한다”며 위령탑 건립 목적을 분명히 했다.

조총련은 이보다 훨씬 앞서 1972년 8월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연행 학살진상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위령탑 건립을 위해 모금을 추진중이라는 얘기가 나돌던 상황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외무부는 “조총련의 위령탑 건립기도는 필히 저지돼야 한다”며 주일 대사관을 통해 조총련의 위령탑 건립 추진상황을 은밀히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주일대사관은 양구섭 참사관을 오키나와 현지에 급파, 현장실사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고 조총련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실사보고를 토대로 토지매입, 건축허가 등 ‘은밀한’ 행보를 계속했다.

1974년 4월 중순 한국과 일본의 민간 무용단이 한국 정부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오키나와에 위령탑 건립을 추진중이라는 보도가 나자 조총련은 “2차대전 당시 희생자는 조선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외무부는 1974년 6월 13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위령탑 건립 계획’ 보고를 올리고 일본 도쿄에 ’위령탑 건립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도 결재란에 사인과 함께 “즉각 지원조치할 것”이라는 ‘특별지시’까지 가필해 위령탑 건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관계부처 실무자회의가 개최되고 비문작성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위령탑 조기건립을 위한 범 정부차원의 총력전이 전개됐다.

또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재일 민단이 자율적으로 위령탑 건립을 추진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추진위 위원장에 당시 윤달용 민단 중앙본부 단장이 임명됐다.

이와 함께 위령탑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신문광고를 통해 전국 각도에서 화강암과 옥석 수집 캠페인을 전개, 이를 통해 모은 돌을 배편으로 오키나와로 직접 수송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75년 4월 9일 오키나와 남단 마부니(摩文仁)에 602평 규모의 위령탑 건립을 위한 기공식이 개최됐고 5개월만인 같은해 9월 3일 정부대표로 당시 고재필 보건사회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탑 제막식이 엄숙히 거행됐다.

조총련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은밀히 위령탑 건설을 추진해온 당시 정부와 주일대사관의 목표가 성취되는 ‘희열의’ 순간이었다.

위령탑 건설과정에서 주일대사관측은 조총련의 위령탑 파손행위를 우려, 일본 경찰당국에 특별 경비를 요청하는 등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조총련측은 위령탑 기공식 직후 ‘일조 국교정상화 오키나와 현민회의’의 이름으로 한국인 위령탑 건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선수를 빼앗긴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