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연구] 외교관 김정일-1 의도적으로 신비감 높여 카리스마 ‘조작’

▲ 2000년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美국무장관과 건배하고 있는 김정일 <사진:조선일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의 좀더 많은 모습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김정일의 육성, 참모들과의 관계, 대화 내용,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알게 됐다.

‘은둔의 지도자’의 신비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외부 노출은 남한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때 ‘김정일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6·15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의 외부 세계 등장을 예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김정일은 그후에도 여전히 대중 노출을 꺼렸다. 오랫동안 굳어진 그의 스타일이다.

김일성 사망 직후인 90년대 중반 문명자 U.S Asian News 주필이 방북했을 때다. 당시 미·북회담의 북측 대표는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이었다.

문씨는 “(국가원수 사망으로) 회담에 차질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강 부부장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정일이)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다고 하시면서 절대 표면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문명자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

해프닝도 있었다. 북한 인민군 건군 60주년을 맞은 92년 4월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 때다. 김정일은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일의 첫 대중적 발언(연설)이었다.

이날 그의 육성은 당초 현장의 마이크로만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송사의 실수로 TV를 통해 북한 전역에 방송됐다. 나중에 방송관계자들이 된서리를 맞았다.(장용철. ‘니들이 북한을 알어’)

재일 조총련이 발간하는 잡지 ‘조국’ 92년 2월호에 김정일의 양복 입은 사진이 실려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의 이 사진은 ‘권력이양 임박’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기까지 했다. 김정일은 평소 인민복이나 점퍼를 주로 입는다. 물론 양복을 전혀 입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모습이 외부에 나간 적이 없었을 뿐이다.

‘조국’에 실린 사진은 이를 잘 모르고 일어난 일이었다. 이렇듯 김정일의 일정은 철저한 보안과 비밀이 유지된 채 추진되고 진행된다. 그의 언행이 국제사회에 직접 노출된 경우는 거의 없다. 방문국의 소식통, 외교채널, 북한의 관영매체 등이 간접적 확인의 주요 뉴스원이다.

외교관 김정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밖에서의 그의 행적보다 안에서의 그의 행적이 더욱 중요한 단서가 될지 모른다. 김정일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서 외교관이기 이전에 정치인이다. 그는 권력의 획득과 유지라는 차원에서만 보면 장기집권에 성공한 상당히 ‘유능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길게 보면 약 30년, 짧아도 10년 이상을 지도자 자리에 있다.

극도로 통제된 대중노출과 그를 통한 신비감 조성, 카리스마의 조작은 바로 김정일을 오랫동안 권좌에 머물게 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이 투명하게 드러나면 그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진다. 때론 인간적, 도덕적, 실무적 약점이 계속 드러나게 된다.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상당한 장애요인이다. 투명성이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 있는 서방사회와는 완벽히 다르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은 국제사회의 다른 국가의 지도자에 비해 아직까지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일이 노출을 꺼리는 것은 바로 외교의 장(場)에서까지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의 노출이 자신의 국제적 신비감과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출은 곧 자신의 국제적, 국내적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러한 그에게 투명성을 강조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은 치명적이다. 반면 북한의 지속가능한 생존은 국제사회로의 동참 없이는 역시 불가능하다. 이런 갈림길에서 김정일의 외교적 선택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가능한 한 국제사회로의 노출을 제한하고 핵억지력과 내부통제, 약간의 외부지원을 통해 그럭저럭 버티는 것(muddling through)이 한 가지다. 다른 하나는 투명한 국제사회의 중간 단계인 중국, 러시아와 적극 교류하고, 한국, 일본, 미국과는 매우 통제된 접촉을 하는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두 번째에 가까운 외교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선택은 통제된 절차와 상징조작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다가 2002년 9월 일본에 대한 납치문제의 투명한 ‘고백외교’가 역작용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주춤했다. 이어 부시 미 행정부가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 방향을 선회했다.

투명성을 최대한 통제하면서 국제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국제수준의 외교 인프라가 김정일을 뒷받침해야 한다. 최근 일본에 전달된 납북자 유골이 DNA검사로 ‘가짜유골’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북한 외교 인프라의 허약함을 드러낸 전형적인 예다.

김정일은 국제사회의 투명성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능숙한 외교관이 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카리스마 강화를 통한 통치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에서 김정일이 대미 비밀교섭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의 외교 스타일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성공 여부는 김정일의 이런 의지를 허약한 북한의 외교 인프라가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출처:chosun.com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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