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김정일의 인형극’에 장단 맞출까?

유럽연합(EU)은 11월 2일 ‘북한에 대한 인권상황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한국정부는 지난 3년동안 유엔인권위원회에 상정된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에 3번이나 불참 혹은 기권하였고 올해도 역시 찬성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또 통일부의 내년 예산안 2조6천334억원 중 ‘명목상’ 북한인권과 관련된 예산은 4500만원으로 전체예산의 5만분의 1, 불과 0.002%가 채 못 된다. 국민의 정부 이래 참여정부까지 ‘북한인권에 눈감기’는 한국 좌파정권의 ‘유구한 전통’이 된 듯하다.

북한인권개선에 너무 무심하다는 국내외의 하소연에 대해 한국정부의 옹색한 변명은 ‘남북한간의 특수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특수관계론에 대한 비판은 물론 넘쳐흐른다. 예를 들어 한인학교를 찾아온 탈북자들을 송환하면 북한 당국에 의해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수용소행 혹은 처형당할 수 있음을 중국정부가 잘 알면서도 강제송환 하는 것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특수관계’ 때문이라는 것이고,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정부가 항의는커녕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문화일보 박용옥).

또 한국은 북한에 비하면 인권상태가 훨씬 나은 벨로루시 등의 인권문제에 대해 유엔인권위에서 찬성투표를 한 것은 한국정부의 ‘인권유린 묵인전통’에 비추어 불공정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정부가 북한인권상황에 대한 점증하는 국제적 관심에 반하여 ‘남북한간의 특수관계’를 내세우는 것이 사실 자체로는 틀리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제로 현재 남북의 특수관계는 한국정부가 북한인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사실상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이 북한의 입장을 ‘배려’한다거나 혹은 특수관계를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다. 배려니 고려니 하는 것은 그나마 한국정부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나 하는 말이다. 대북정책에 관한 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김정일 정권에 사실 인질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다. 왜 그러할까? 그것은 이 두 정권이 추구하는 햇볕정책의 ‘논리적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좌파 햇볕정책의 구조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중 하나인 북한을 한국이 포용해 개방시키겠다는 햇볕정책은 그 명칭을 이솝우화에서 따온 것이다. 어떤 정치학자는 햇볕정책의 명칭에 대하여 말꼬리잡기식의 시비를 거는 것은 사태의 핵심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지만, 필자는 햇볕정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칭의 배경인 이솝우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추운 바람(고립정책)이 외투를 벗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볕(포용정책)이 두껍게 껴입은 옷을 벗게 만든다는 것이 우화의 내용인데, 여기서 외투를 벗는다는 것은 북한이 빗장을 풀고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으로 선회함을 비유한 것이다. 그만큼 포용정책이 ‘자연스럽게’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핵심은 이솝우화의 논리적, 인과적 구조와 햇볕정책의 구조가 동일한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햇볕정책은 단순히 명칭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솝우화의 인과적 구조를 보면 햇볕이 원인이고 외투를 벗는 것이 결과이며, 이들간의 관계는 일종의 자연적인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햇볕을 계속 쪼이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외투를 벗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의 인과구조는 어떠한가? 일견 이솝우화와 똑같이 포용정책이 원인이고 북한의 개방이 결과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실은 북한의 폐쇄상태가 원인이고 포용이 결과라는 점은, 질병이 원인이요 의사의 치료행위가 결과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질병의 경우 의사의 치료가 원인으로, 그리고 환자의 건강회복이 결과라는 그 다음의 인과사슬이 이어진다.

문제는 좌파정권의 햇볕정책의 경우 포용이 개방을 인과적으로 유도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각종 경제적, 정치적 지원, 즉 남한의 포용이 조금도 기분 나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포용의 상태가 지속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분 좋은 포용정책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열쇠를 북한 스스로 쥐고 있다. 즉 포용의 원인인 폐쇄가 바로 그것이다. 이솝우화의 경우 햇볕을 쪼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옷을 계속 입고 있는 것은 고통을 의미한다. 즉 이솝우화는 옷을 벗을 수밖에 없지만, 햇볕정책의 경우 실은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식 상호주의

물론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북한의 변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즉 북한이 개방으로, 시장경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통일부장관 정동영은 북한이 좀 더 자신감을 갖고 개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발언을 했는데, 우리 국민들이 잊어버리기를 잘해 망정이지 이런 이야기는 이미 1998년 이래 계속 들어왔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북한이 바로 이 햇볕정책의 결과로 기대되는 개방을 필요하면 맛뵈기식으로 연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햇볕정책의 원인인 폐쇄나 그 결과인 개방 모두가 김정일 정권이 마음먹은대로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겉으로는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김정일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의 이런 분석이 현실과 과연 부합하는지는 지난 8년간의 남북관계를 훑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햇볕정책을 선언한 이후 얼마까지는 포용의 효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자 ‘선공후득(先貢後得)’이라는 명분으로 버티다가 나중에는 북한의 자그마한 변화도 무조건 햇볕정책의 결과로 ‘확대해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올해 북한을 방문한 한국국민이 해방 후 50년 동안 북한을 방문한 숫자를 전부 합한 것보다 더 많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금강산관광이 대종이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은 북한의 산자락을 보고 오는 것이지 남북한 국민간의 의미 있는 교류가 아니다. 또 개성공단 역시 북한인민의 싼 임금을 중심으로 남한의 기업과 김정일정권이 나누어먹는 식이지 북한에 시장경제가 도입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즉 김정일은 한국의 돈을 챙기고 대신 남한의 좌파정권에게 남북교류의 ‘상징’을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북한식 상호주의’인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경우 정치인을 통일부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정치공학적 상징의 극대화에 필요한 엄청난 돈을 국민의 혈세와 빚으로 조달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한국정부는 김정일의 인형극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까? 그것은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이 대북정책의 노선과 성과에 정권의 정체성과 운명을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즉 이 두 정권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대응에 맞추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초창기에 ‘선언’된 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실패’로 간주되리라는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불가오류성(不可誤謬性)에 사로 잡혀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좌파정권의 대북정책은 외통수로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간에 들인 노력과 투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이제 유연해지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한국좌파의 약점을 꿰뚫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초기에 햇볕정책을 그렇게 격렬하게 반대하던 김정일 정권이 ‘우리민족끼리’라는 명분하에 한국좌파와 찰떡공조가 된 이유도, 서해교전 등을 거치면서 한국 좌파정권의 ‘진심’, 즉 김정일 정권에 대한 일편단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해서 김정일은 한국이 제공한 쌀 50만톤을 받은 후 시장경제는커녕 외국 구호요원을 철수시키고 다시 배급제로 돌아갈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좌파적 햇볕정책은 한국을 폐쇄적 폭정의 보급기지로 만들었다.

개방은 고통의 결과

이와 같은 ‘남북의 특수관계’ 하에서 북한인권결의안에 한국 좌파정권의 찬성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북한인권단체와 야당, 그리고 뜻있는 재미동포들이 북한인권에 대한 한국정부의 비겁한 태도를 유엔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사과하고, 이는 결코 대다수 한국국민의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는 것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에서 대북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자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햇볕정책이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북한의 개방은 고통의 결과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옷을 벗는 것은 더위가 참기 어려워서 벗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극악한 인권상황을 개선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열린우리당의 장영달 의원처럼 탈북자를 북한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에 중국으로 도망간 사람들로 색칠하여 북한인권 문제를 소소한 문제 혹은 없는 것으로 호도하는 것은 인간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 치하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유태인들과 집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을 모두 잡범들로 간주하여 인권유린을 당연시하는 행위와 진배없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