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락 오바마 차기행정부의 국무부 인선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 지 주목되고 있다.
지난 3년간 북핵 협상을 주도해온 ‘힐-김계관 라인’이 차기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유지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일단 오바마 정부는 국무부의 한반도 관련 정책의 실무 책임자인 동아태 차관보와 6자 수석대표 업무를 분리, 특사를 신설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언론 동향을 보면 힐 차관보가 이 특사에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워싱턴 포스트(WP)는 지난 15일 힐 차관보가 오바마 차기 행정부에서 특사직을 맡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외교소식통은 27일 “오바마 진영이 북핵문제 전담 특사를 두겠다고 공언했고 동아태 차관보가 북핵 문제에 매달리느라 다른 일들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제기됐었다”면서 “오바마 정부가 북핵 특사를 따로 둘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특사 후보로는 힐 차관보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힐 차관보가 특사를 맡게 되면 이는 북핵 문제의 현재의 틀을 유지하면서 부시 행정부와의 연장선상에서 다루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핵 문제를 지역국에서 다루지 않고 독자적으로 다루겠다는 의지”라며 “그동안 동아태국이 북핵문제에 한정된 활동을 하다 보니 중국이나 중동 등 미국으로서는 훨씬 중요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윤 교수는 “오바마 정부에선 북핵과 다른 문제를 분리하겠다는 것”이라며 “(힐 차관보의 특사설은)북핵문제의 틀을 이어가고 부시 행정부와 연장선상에서 관리를 착오 없이 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담당자를 바꿀 경우 새로이 판을 설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동안 힐 차관보는 북핵 문제가 기로에 놓일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특히 BDA(방코델타아시아)문제, 핵 신고서 제출, 테러지원국 해제 등의 고비마다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부상과의 만남을 통해 6자회담의 모멘텀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힐-김계관 라인이 주목된 것은 2005년 7월 9일 베이징에서다. 당시 두 사람은 2004년 6월 3차 6자회담이 열린 이후 13개월 동안 공전됐던 6자회담 재개를 전격적으로 이끌어냈고, 이는 ‘9·19공동성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후 BDA문제를 해결했고 2007년 ‘2·13합의’에 이어 ‘10·3합의’도 도출했다.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에 따른 북한의 불능화 조치 중단에 따라 북핵을 둘러싼 위기감이 고조되던 지난 10월에는 힐 차관보가 직접 평양으로 들어가 김 부상과 검증협상을 벌인 끝에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해제와 핵검증체계 합의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10월 초 미·북이 합의했다던 검증방안을 놓고 미국은 ‘시료채취에 합의했다’고 하고 북한은 이를 부인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결국 이달 초 열린 6자 수석대표회담에서 검증의정서 합의에 실패, 비핵화 2단계가 마무리되지 못한 채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넘겨받게 됐다.
이처럼 북핵 문제와 관련한 전 과정을 놓고 볼 때 6자회담이라는 판을 깨지 않고 유지하면서 고비 고비를 넘겨온 힐 차관보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내정자도 지난 16일 힐 차관보의 브리핑을 받고 이 같은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반면 이를 두고 힐 차관보의 북한에 대한 오판과 독선적 대북협상으로 인해 북한의 잘못된 버릇만 키웠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에 따라 힐 차관보의 역할도 ‘이제 끝났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지난 2006년 북핵 협상 당시 협상팀의 차석대표였던 빅터 차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국장은 “그는 효율적인 협상가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영웅이 되기 위해 언론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미 국무부 내에선 그를 ‘김정힐(Kim Jong Hil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대북 협상의 실패를 막기 위해 무조건 김정일에게 양보만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핵 전문가 캐롤라인 레디는 “그것은 협상도 아니었다. (당근만 있고) 채찍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힐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일단 현재 미국 내 기류는 힐 차관보의 역할에 긍정적이다. 따라서 그가 다시 오바마 행정부에서 기로에 놓인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