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 北김정일 주도 강제납치 진실…‘연인과 독재자’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 씨 납치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가 시사회를 통해 공개됐다. 그들이 제작한 수많은 영화보다 더 화제가 됐던 납북과 탈출, 망명에 이르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번 영화에는 북한 김정일의 육성도 포함돼 있다.


2일 시사회에서 상영된 이 영화에는 김정일이 “도대체 왜 장면 장면마다 자꾸 초상난 집처럼 우는 것만 찍게 만드나, 우리 영화 안 우는 영화는 안 되겠나. 상갓집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만드나”면서 북한 영화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이 담겼다.


또한 김정일은 “우리도 (예술대회에) 나갈 만한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쪽(남한)은 대학생 수준인데, 우린 이제 유치원 수준”이라며 남북 영화 현실을 비교하는 대목이 등장하기도 한다.


1970년대 후반 이미 북한 정권의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던 김정일은 평양에 개인 필름 라이브러리(영화문헌고)를 둘 정도로 광적인 영화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영화에는 김정일이 “(신 감독이)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뜻을 가지고 (북한으로) 오는 방법이 없나? 신 감독을 유인하려면 뭐가 필요한가”라고 당시 상황을 언급한 내용도 담겨 김정일이 북한의 영화발전을 위해 신 감독의 납치를 지시했음을 추정케 하는 대목도 담겼다.


김정일의 육성은 북한으로 납치된 신 감독이 김정일을 만났을 때 몰래 녹취한 것으로 이번 영화를 통해 공개됐다.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북한에 먼저 납치된 것은 최 씨였다. 1978년 1월 홍콩 영화관계자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의 초청으로 혼자 홍콩을 찾은 최 씨는 그 길로 보트에 태워져 북한으로 납치된다.


신 씨도 그 해 7월 영화관련 업무상 홍콩에 머물다가 최 씨와 같은 경로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다. 그러나 부부의 재회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83년에서야 이뤄진다.


부인인 최 씨는 납북 직후부터 김정일과 수차례 만나며 연회에 초청받는 등 ‘지도자 동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북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신 감독은 1979년 탈출을 시도하다 3년 반 동안 정치보위부 특수 감방에 수감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채 2평이 못되는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동자세로 지내는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다. 감방에서의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한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투쟁까지 벌이게 된다.


신 감독의 석방 이후 재회한 부부는 김정일 직접 지시로 북한 영화 제작에 뛰어들게 된다. 신 씨는 전폭적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신필름영화촬영소(신필림)를 세웠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심청전’ ‘소금’ 등을 제작했다.


이 중 신 감독은 ‘돌아오지 못한 밀사’라는 작품으로 1984년 체코 카르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부인 최은희 씨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탈북민들에 따르면 신 감독은 불철주야로 영화에 매달렸다. 북한 주민들은 신필림 영화에 매료됐는데, 영화가 개봉되는 날에는 평양시내 ‘개선영화관’과 ‘전승영화관’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뇌물을 주고 표를 사는 바람이 불어 영화관 직원이 인기직종으로 떠올랐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신 감독은 틀에 박힌 북한 영화를 대담히 깨고, 사회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철길을 따라 천만리’를 촬영할 때 그는 생동한 장면을 찍기 위해 촬영기를 메고 레일 위를 뒹굴 만큼 ‘촬영광’이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한편, 납치 이후부터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였던 두 사람에 대해 1984년 4월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은 ‘북한에 의한 강제납북’이라는 입장을 공식 발표한다.


영화 활동을 통해 김정일의 총애를 받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부부였지만, 독재체제 하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주민생활을 직접 보며 괴로운 마음도 느끼게 된다. 특히 자유를 억압받는 상황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결국 이 부부는 1986년 영화제 참석차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하던 중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부부는 2001년 초까지 미국의 머물다가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부부는 탈출 후 북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는 수기집을 펴냈다. 김정일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김정일 개인에 관한 정보가 외부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두 사람 수기집에는 한국 노래와 여배우들을 좋아하는 김정일의 취향, 도박판이 벌어지는 김정일과 측근들의 비밀파티, 우상화 작업을 직접 지시하면서도 그들의 찬양을 가짜라고 생각하는 독재자의 면모까지 김정일 사생활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이들은 수기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인류사상 유례없는 개인숭배로 치닫고 있다”면서 “우리가 북한 정권에 조금이나마 가능성과 희망을 걸 수 있었다면, 일생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북 대화의 교량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그곳을 탈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버트 캐넌, 로스 아담 감독 “한국서 수많은 루머에 묻혀 사실이 부정된 사건오직 진실을 증명하고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를 연출한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은 “이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스펙타클한 이야기가 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면서 “한국에서 이 사건은 수많은 루머에 묻혀 사실이 부정되기도, 혹은 목적에 의한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면 했고 오직 진실을 증명하고 보여주고 싶었다”고 영화를 제작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영화 속에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최 씨 인터뷰와 최 씨 아들과 딸, 홍콩 형사, 과거 비공식 CIA 소속 인원 등의 인터뷰가 삽입됐다. 제작진은 이 작품 촬영을 위해 2년여에 걸쳐 최 씨 가족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2016년 선댄스영화제 월드 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베를린국제영화제, 에든버러국제영화제, 멜버른국제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클리블랜드국제영화제, 하와이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바 있다. 국내에선 9월 22일 개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