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직접 밝힌 얘기다. 2018년 6월 역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이 만나 비핵화 합의를 이룬 이후 올 1월 1일 신년사를 발표할 때만 해도 북한은 적어도 대외적으로 ‘새로운 길’보다는 ‘비핵화’에 방점을 두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근엔 북미 비핵화 협상의 문이 빠르게 닫히는 모양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이달 두 차례 핵탄두 실전배치를 위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엔진 관련 실험을 진행했고, 28일 진행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선 핵보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최근 북미가 ‘로켓맨’ ‘늙다리의 망령’ 등 말 폭탄을 주고받자 2017년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올 초만 해도 ‘빅딜’의 가능성이 보였던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노딜’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2차 북미회담을 결렬(일명 하노이 노딜)이 2019 북미 비핵화 협상의 패착이라고 지적한다. 미국도 당초 실무협상에서 거론된 회담 의제에 없었던 과도한 비핵화를 요구했고, 북한도 제대로 된 비핵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결렬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은) 완전하게 제재를 완화할 준비는 안 돼 있었으며 우리가 원했던 것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협상이 북한의 비핵화 실행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 사이에서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됐음을 확인한 것이다.
리용호 외무상도 3월 1일 새벽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영변 지구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 물질의 생산 시설들을 미국 전문가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제거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영변에 국한해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북측의 영변에 대한 핵시설 폐기 계획은 2월 27일 1차 회의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북측은 28일인 둘째 날 회담이 결렬될 분위기로 흐르자 회의 말미에서야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구체적 폐기 계획을 북측이 내놓은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처음부터 영변 플러스 알파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 제재 해제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하노이에서 북한이 제시한 카드는 처음부터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고 지적한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이 영변 폐기만으로 제재를 완화해주는 북한의 안을 받았다면 북한의 나머지 핵시설을 묵인하는 결과가 초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연구위원은 이어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있었다면 영변뿐만 아니라 적어도 모든 북핵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도 밝혔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박원곤 한동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도 “핵시설만 300여 개라는 점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 자체도 상당히 복잡한 문제인데 북한은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회의장을 떠나는 시점에 영변 카드를 꺼냈다”며 “영변만이라도 폐기 의지가 있었다면 북한은 다음 실무회담을 잡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후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것이 트럼프 정부의 바람”이라면서 북미 간 비핵화 논의가 이어지길 희망한다고 밝혔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예상치 못한 비핵화 협상 결렬에 김 위원장은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베트남 경제 시찰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 일정을 예정보다 하루 앞당긴 김 위원장은 귀국 직후 대내적으로는 자력갱생의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비공개적으로 북미 협상 결렬의 책임자들을 내세워 처단 작업에 들어갔다.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는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으며 김영철 부위원장도 형식적으로 짧게나마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다. 본지 취재결과 핵 관련 기밀을 지키지 못하고 미국 측이 알게 했다는 이유로 간부 2명이 비공개 총살된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4월 1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4차 전원회의를 열어 신년사와는 색깔이 달라진 대내외 정책을 발표했다. 대내적으로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대외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김 위원장은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되어 오판하는 적대 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튿날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그 무슨 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미국에 올해 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오라고 압박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권정근 외무성 미국 국장,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등을 통해 일방적인 담화문을 발표했을 뿐 대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만남을 제안하면서 6월 30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이 이뤄졌지만 북측은 2~3주 안에 실무회답에 돌입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3주가 아닌 3달 뒤에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실무협상에서도 북한은 회의 내내 미국의 입장을 청취하기만 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무협상을 일방적으로 결렬시킨 후 북측 협상 대표인 김명길 대사는 “이번 협상이 아무런 결과물도 도출해 내지 못하고 결렬된 것은 전적으로 미국이 구태의연한 입장과 태도를 버리지 못한 데 있다”며 준비된 성명문을 발표했다.
북한 노동당의 내부 소식에 정통한 중국의 한 전문가는 “스웨덴 실무협상은 처음부터 북측이 협상을 결렬시키러 갔다”면서 “하노이 때의 설욕을 갚아주기 위한 의도가 컸다”고 말했다. 그만큼 하노이 결렬에 대한 김 위원장의 실망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스톡홀름 실무회담 결렬 이후 연말 시한을 거론하며 “미국이 어떻게 이번 연말을 지혜롭게 넘기는가를 보고 싶다”고 압박했다. 12월 들어 북한은 서해 동창리 발사장에서 이뤄진 두 차례 ‘중대한 시험’을 통해 핵무기의 위력을 시험했다.
지난 28일 진행된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이번 12월을 통하여 우리가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주의자들을 비롯한 전 세계가 매우 긴장된 것을 보면서 우리 당과 혁명 무력의 핵무장력 강화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더욱 절감하게 됐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북한은 전원회의 진행 사실을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회의 내용은 밝히지 않으면서 불예측성을 높였다. 비핵화 협상 여지를 완전히 깨버리지 않으면서 모호성을 높여 나름의 협상력을 높인 셈이다.
북한이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의 여지를 남겨 놓으면서 내년 미국 대선 전까지 협상을 끌고 갈 것인지, 레드라인을 넘는 군사적 도발과 핵무장력을 강화하는 내부적 조치를 취해 협상의 판을 완전히 깨버릴 것인지 김 위원장의 신년사에 관심이 쏠려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든 김 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에서 언급한 ‘완전한 비핵화’는 요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