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18대 대통령 선거 당선인의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들이 관통하고 있다. 대한민국 고도성장을 이끈 근대화 대통령의 장녀였지만, 부모가 모두 흉탄에 유명을 달리하고는 한 여성이 홀로 오롯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우여곡절이 결국 그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끌어올린 힘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서거하자 박근혜 당선인은 스물둘의 나이로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올랐다. 수백 건의 민원을 점검하고 소외된 이웃을 직접 찾거나 보살피는 등 육 여사가 생전에 진행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박 당선인은 이 당시 항상 ‘이럴 때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고 생각했다고 한다. 육 여사 서거 한 달 후 어머니가 매년 축사를 했던 배구대회에 참석한 박 당선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식순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조가가 울려 퍼지자 장충체육관에 모인 선수와 관중이 숙연해졌고, 선수 중 어느 누군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선수들에게도 퍼져 체육관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여읜 자식으로서 검은 상장을 달았지만 장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저까지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참느라 애를 쓰면서 간단히 인사말을 마쳤습니다. 체육관을 나오는 길에 곁에 있던 분이 ‘근혜 양의 의젓한 모습에 우리는 감탄했어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어머니 육 여사가 서거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박 당선인의 삶은 두 사람과 깊숙이 연결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 당선인은 부모의 업적과 과오를 모두 짊어지고 가야만 했다.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박정희의 나이가 36세로 육군본부 작전교육차장으로 일하던 때다. 유년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광주와 진해, 서울 노량진 셋방 등을 떠돌았다. 박 당선인이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1년 5월 15일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성공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의장을 거쳐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박 당선인도 의장 공관과 신당동 집을 거쳐 청와대에 들어간다.
대통령의 딸이었지만 성심여중 친구들은 박 당선인을 평범한 친구로 기억한다. 어머니 육 여사가 특권의식을 갖지 말라며 학용품도 비싸지 않은 것을 쓰게 했고 도시락도 보리밥 혼식에 감자조림 정도로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 놀러 온 친구들이 국수와 삶은 계란에 실망할 정도였다. 당시 학창시절 친구들이 박 당선인의 느린 말과 행동을 지적하자 “어머니가 말할 때나 행동할 때 천천히 해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원효로 4가에 있는 성심여중까지 꼬박 전차나 버스로 학교를 다녔다. 전차를 타고 학교로 가던 박 당선인에게 당시 전차 차장이 “네가 다니는 학교에 대통령 따님이 다닌다는데 혹시 아니?”라고 묻자 “알아요”라고 대답하고도 자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공부도 그럭저럭 하고 키는 저만하다고 대답한 일화를 아침 밥상에서 가족에게 이야기하자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모두가 파안대소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1970년 박 당선인은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청와대에 지내면서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국가발전을 위해 전자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공대로 바꿨다. 1974년 이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곧장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 육 여사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당시 박 당선인은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했다. 박 당선인은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저격당한 후 “아버지의 셔츠를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박 당선인은 아버지 곁에 남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다. 박 당선인은 공개행사와 만찬, 산업시찰 등에 박 전 대통령과 동행했고 독자적으로도 퍼스트레이디 업무를 봤다. 아버지와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며 국정에 대해 조언을 하고 일부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전달해 청와대 야당이라 불렸던 어머니의 역할을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비판도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서로 대립하고 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부터 해임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을 정도다. 그는 1989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부터 점심때마다 누가 후임 대통령으로 적당하냐고 나에게 물으셨다. 저는 어떤 사람이 적당하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최규하를 생각하고 계시구나’라고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됐다. 이 소식을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해 들은 박 당선인은 바로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버지 장례로 9일장을 치른 뒤 박 당선인은 청와대 생활을 정리하고 신당동으로 돌아온다.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3남매를 대신해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한 6억 원을 박 당선인에게 건넸다. 이 돈에 대해 이번 대선 TV 토론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후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때부터 박 당선인에게 예기치 않은 고난이 시작된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박정희 시대를 유신과 부패의 시대로 규정하며 부정적 해석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 집권의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박정희 격하운동이었던 셈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 전 대통령 부부의 현충원 추모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얼굴을 바꾸고 이 대열에 동참하자 박 당선인은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박 당선인이 당시 일기장을 엮어 펴낸 수필집에는 당시 심정이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확대됐음이 엿보인다. 박 당선인은 일기장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려웠던 시절, 견디기 힘들어 미치지 않고 살았던 게 기적이었던 시절, 타락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극복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좋은 글들을 많이 읽으며 글귀를 적고 다시 읽어보곤 했다”고 적었다. 시인 김지하는 박 당선인에게 “배신의 시절을 감당하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1987년 10월이 돼서야 현충원에서 아버지 추모식을 할 수 있었다. 1988년 박정희, 육영수 추모 사업회를 발족하고 명예회복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인다. 1988년 영남학원 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직도 동생 근령 씨와의 다툼으로 그만둔 후에는 공개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박 당선인은 글을 쓰고 여행을 하며 심적인 위안을 했다고 한다.
침묵의 시간을 보내던 박 당선인은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당시 외환위기가 정치 입문의 결정적 동기였다고 말했다. 이듬해 4월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달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박 당선인은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반발해 2002년 ‘집단 지도체제’ 등의 정치개혁을 외치며 전격 탈당했다. 그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정치적 홀로서기에 나섰다. 이 시기에 전격 방북해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후일 자서전에서 김정일에 대해 “화법과 태도가 인상적이었고, 터놓고 대화를 나누며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해 보수진영에서 나이브(naive)한 인식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열풍으로 위기를 맞은 이 총재가 박 후보의 정치개혁방안을 전폭 수용하며 도움을 요청하자 여러 논란 속에 다시 복당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정치인은 한순간 발을 잘못 내디디면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알게 됐다”는 말을 남겼다.
2004년 3월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총선을 앞둔 당의 존립까지 의심받던 시기에 박 당선인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 대표를 맡은 이후 천막당사와 대국민 사과 등을 통해 당 이미지 회복을 시도해 총선에서 121석을 얻는 선전을 펼쳤다. 2006년에는 지방선거 직전 서울에서 유세 중에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 직후 병상에서 “대전은요?”라며 선거 상황부터 찾았다는 말이 알려지면서 한나라당은 모든 시도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일궈냈다. 이후 박 당선인은 보수진영의 대표적 정치인이자 구원투수로 부상했다.
박 당선인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명박 후보에게 2천여 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당시 경제 살리기를 염원한 국민적 바람이 영향을 미쳤다. 박 당선인은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말을 남겨 보수진영의 분열 우려를 해소했다. 이후 이회창 후보의 러브콜도 마다하고 이명박 후보의 지원유세를 펼치며 신뢰와 약속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당에서는 대선 여진으로 친박과 친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됐고, 2008년 총선에서 친박이 대거 낙선하자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을 남겼다. 친박 일부는 당 바깥에서 ‘친박연대’를 만들어 다시 원내로 진출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명박 정부 기간 내내 차기 대권 후보 1순위로 거론되던 그는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비상대책위원장 직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당 전반을 일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은 19대 총선에서 과반을 넘는 예상 밖의 성과를 냈다.
이후 18대 대선 과정에서 당내 타 후보들을 여유 있게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박 당선인은 이후 정권교체에 대한 열기와 안철수 현상, 단일화 등의 난관을 뚫고 대한민국의 최초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