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지식인들의 ‘지난 여름’을 기억한다

▲ 평양 ‘재북인사 묘역’의 춘원 이광수 묘비

베이징 4차 6자회담에 이목이 쏠린 가운데, 27일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가 가슴을 아릿하게 저민다. 평양에 납-월북 인사 묘역이 새로 조성되었다는 소식이다.

북한에서 열린 남북민족작가대회 기간 중 남측 작가단의 요청으로 공개된 납-월북 인사 묘역은 평양시 용성구역 용성 1동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측은 이 묘역을 ‘재북인사 묘역’이라고 설명했다.

‘재북인사 묘역’에는 춘원 이광수, 위당 정인보, 안재홍 전 민정장관, 현상윤 초대 고대총장, 애국지사 박렬 등 6.25 전쟁 당시 납북 및 월북한 저명인사 62명의 묘가 조성돼 있다.

묘역 안내원에 따르면 이들의 묘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2003년부터 용성1동에 묘역을 조성, 안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어진 묘비 사진 한 장이 50여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묘비에는 춘원의 사진과 ‘리광수 선생 1950년 10월 25일 서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50년 지나 납-월북인사 묘역 챙기는 이유

남측작가단 방북 기간 중 묘역에 나온 납북 제헌 국회의원 최태규 옹(재북 평화통일촉진위원회 상무위원)은 “춘원은 폐결핵이 심해져 만포 소재 군인민병원으로 후송중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춘원의 사망원인에 대해 전쟁중 폭사설, 병사설 등이 있었다. 물론 최옹이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지어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춘원의 사망원인이 단순히 폐결핵이라는 ‘의학적 요인’이 결정적이었을까?

묘역 관리인에 따르면 북한당국은 2003년부터 납-월북 인사 묘역을 새로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춘원을 비롯한 납-월북 인사들이 사망한 시기는 줄잡아 50년이 된다.

북한당국은 50년 동안 여기저기 흩어진 묘를 방치해두다 왜 이제서야 새삼스럽게 묘역을 단장하는 것일까?

정지용 임화 한설야 김기림 박영희 등 월북 문인들이 사망한 시기는 대체로 50년대~60년대로 알려진다. 분단 후 40여년 동안 이들의 사망원인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북한의 고위 인사들이 남한과 서방세계로 망명하면서 그동안 소문으로 떠돌던 납-월북 문인들의 생사소식과 사망원인이 조금씩 알려져 왔다.

대부분의 ‘남반부 출신’ 지식인들은 53년~56년까지 전개된 남로당 계열 1, 2차 대숙청과 5차 전원회의 ‘사상 대검토 회의’를 통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 시기를 그나마 넘긴 남한출신 인텔리들은 67년 ‘5.25 교시’ 이후 대부분 ‘청소’되었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수령독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 사회가 프롤레타리아적이냐, 부르주아적이냐로 대별되어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은 모두 계급독재의 청소대상이었다.

김정일의 ‘처형’(妻兄)되는 성혜랑은 수기『등나무집』에서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남반부 출신에게 양잿물을 뿌린 5차 전원회의 재검토라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무서운 사상투쟁이 전국을 휩쓸었다. 그때 남반부 출신 대부분은 중앙기관에서 축출되고 지방으로 내려먹였으며(좌천되었으며), 자자손손 종파 혹은 연루자로 낙인찍혔다. 대학에도 남조선에서 좌익투쟁을 남반부 출신이 추방되었다.”

김정일의 ‘우리민족끼리’ 도우미로 나선 문인들

월북시인 임화는 간첩으로 몰려 온 집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국내 경제학자 1호(경제사) 백남운 선생도 이 무렵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생을 마감했다.

시인 한설야도 간첩혐의가 씌워져 통제구역에서 사망했다. 당시 김일성은 한설야를 처형하기 전 ‘죽기 전에 고기라도 맛보라’는 뜻으로 송아지 고기를 보내지만 한설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되돌려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필자가 고위 탈북자에게 들은 바로는 춘원은 북쪽 지방 어느 산골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 마을의 시냇가에 이름 모를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는데, 당국이 조사 나와 춘원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춘원은 강가의 버려진 돌멩이처럼 자신의 마지막 생에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북한당국은 춘원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친일의 말로’를 보여주려 했다는 소문도 있다. 분단후 납-월북 지식인들은 계급독재의 광풍에 쓸려다닌 낙엽같은 신세였다. 대부분 그렇게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70년대 이후 북한당국은 해외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성화’ 때문에 납-월북 인사들의 묘를 챙겨준다. 해외 인사들이 북한을 찾을 때마다 ‘백남운 선생 묘는 어디에 있느냐’는 문의가 잇따르자 북한당국은 ‘우리도 백선생을 잘 모시고 있다’는 선전 차원에서 신미리 열사능으로 이장해준다. 그러나 백선생 묘 안의 유해가 진짜 본인 것인지, 막말로 개뼉다귀를 묻어 두었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도 없다.

북한당국이 2003년부터 납-월북 인사들의 묘를 챙기기 시작한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남한에서 올라간 인사들에게 선전하는 차원에서, 이른바 ‘우리민족끼리’ 차원에서 그야말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5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버려진 시체’들을 새로 수습해주어야 할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황색 구라’의 앞날

이번에 남북민족작가대회에 참석한 ‘남반부 출신’ 문인들은 과연 이러한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문단의 대선배들이 무엇 때문에 죽어갔는지, 계급독재-수령독재-봉건군사독재에서 지식인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를 ‘감’(感)이라도 잡고 있을까? 그러고도 김정일의 ‘우리민족끼리’ 선전에 스스로 도우미가 되어 평양에서 ‘우리끼리의 축배’를 든다?

지금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20만 명이다. 방북 문인들은 평양에 가서 왜 정치범 수용소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못 꺼내는가? 선배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왜 한마디도 항의하지 못하는가?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어찌 해서 단 한번이라도 머리 꼿꼿이 세우고 할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참으로 위선에 물든 가여운 지식인들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훗날 김정일 독재체제가 제거되고, 북한이 민주화되는 날 이들은 또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죽어가고 있는 북한인민들의 혼령에 그들은 어떤 반성문을 쓸 것인가.

우리의 피붙이가 이 순간에도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래도 우리는 진정 민족을 위한 작가였다고 둘러댈 것인가. 그래도 ‘나의 조국은 모국어였다’며 또다시 ‘황색 구라’를 풀 것인가?

이제 누가 진정 역사 앞에 선 지식인인지 옥석을 가릴 날도 머지 않았다. 역사는 ‘당신들이 지난 여름 무엇을 했는지’ 기록해놓을 것이다. 그때 가면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구라’인지도 밝혀질 것이다.

손광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