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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혁 씨가 14살 되던 해 어머니와 형이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공개처형을 당했다.
어머니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형은 총살당했다. 신 씨는 맨 앞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부탁에 신 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수용소는 부모 자식간의 천륜의 정마저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엄마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크게 엄마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할 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엄마와 형이 죽는 모습을 볼 때도 분하거나 슬프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는다.”
신 씨가 거주하던 수용소에서는 1년에 4번 정도 수인들을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탈출을 기도했거나 도둑질 한 사람들이 처형 대상에 속했다.
신 씨 또한 어머니의 탈출 시도로 고문을 받았다. 보위부원들은 14살 소년의 손과 발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등 밑에 화로를 놓았다. 그때 고문의 흔적이 신 씨의 등에 선명히 남아있다.
엄마 잃은 열네살 소년 화로 위에 매달아
“고문 받는 곳에서 풀려나올 때 같이 끌려왔던 아버지를 보게 됐다. 아버지와는 그 후에도 가끔 시간이 있을 때 만났다. 만나도 특별히 하는 얘기는 없었고,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지금도 수용소 안에 계신다.” 정치범수용소는 가족간의 천륜마저 존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수용소에서의 22년 동안 신 씨는 감정을 표현 할 줄 몰랐다. “감정이란 것이 없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생활하지만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 많다. ‘슬프다’ ‘기쁘다’ ‘보고싶다’ ‘아프다’ 같은 단어 자체를 몰랐다.”
그에게 들은 수용소의 실상은 거대한 감옥, 그 자체였다. 죄수복 같은 단체복에 남자들은 머리를 모두 짧게 밀었고, 여자들은 단발로 잘렸다.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 12시에 취침하고, 하루 종일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점심식사를 하는 1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한 방에는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수감됐다. 저녁에는 담당 보안원이 생활총화를 진행했다. 여기서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매를 맞아야 했다. 남녀간의 연애는 전면 금지됐으며, 발각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
신 씨에게 완전통제구역인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얘기를 꺼내니 “정치범수용소에서 오셨다는 분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 된다”고 말했다.
평생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가 바깥 세상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것은 2004년 6월이었다.
“공장에서 한 조로 일하게 됐던 아저씨에게 바깥세상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원래는 그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상부에 고발해야 하는데, 얘기를 듣다보니 너무 호기심이 생겨서 말하지 못했다. 그 분은 탈북 경험도 있었는데 평양에 대해서도 이때 처음 들었다. 이렇게 반년 정도 얘기를 듣다보니 어려서부터 당한 일이 억울해졌다. 이 곳이 지옥같이 느껴졌다.”
“한국에 와서도 수용소 안에 있는 듯한 착각 느껴”
결국 신 씨는 다음 해인 2005년 1월 2일 탈출을 실행에 옮긴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완전통제구역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 안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불가능한거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1월 2일 산에 화목(나무)하러간다고 들었다. 그러면 철조망 가까운 데로 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 전 날 탈출하자고 내가 먼저 아저씨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아저씨도 탈출할 수 있겠느냐고 꺼려했었다.”
2일 아침. 두 사람은 긴장된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철조망을 지키는 경비병들과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원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감시의 눈이 미치지 않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아침부터 기회를 봤지만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막상 발길이 안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 탈출 안하면 다신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철조망을 향해 달렸다. 아저씨가 먼저 달려 나가다 철조망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그 위로 넘어서 철조망을 건넜다. 아저씨가 넘어진 것은 알았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뛰쳐 나왔다. 그 뒤로 그 아저씨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모른다.”
신 씨도 당시 전기 철조망을 넘다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북한 사회를 전혀 모르는 그가 어떻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저씨를 통해 북한 사회에 대해 들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25일간 빈 집을 돌며 도둑질을 했다. 옷도 갈아입고 먹을 것도 훔쳐 먹었다. 북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보따리 장사꾼들을 따라다녔다. 차잡이(히치하이킹)를 하면 나도 얻어 타고, 화차(기차)에 매달리면 같이 매달리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억울하다는 말조차 몰랐다”
같이 다니던 장사꾼들이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았냐고 물으니 “나한테 크게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보위부원들도 피해 다녔었다. 나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흥단군 삼장리에서 국경을 넘었다. 하느님이 있다면 그때 나를 지켜준 것이 아닐까.”
중국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생활은 다른 탈북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 숨어 살면서 소 방목도 해주고 일을 도와줬다. 1년간 지내며 어느 정도 알게 되니깐 거기에 있는 것이 무서워졌다. 라디오를 들으며 한국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선 남방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에 길을 떠났다가 상해 영사관에 들어가게 돼 지난해 8월 한국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도 수용소의 악몽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나원에서 한 달 생활하는 동안 계속 악몽을 꾸고 잠도 잘 못 잤다. 기분도 계속 안 좋아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우울증이라고 진단 받았다. 두 달 정도 입원하면서 약물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이긴 하지만, 인터뷰 중간에 힘들어 질 때도 많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특별히 기분이 좋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가 관리소를 벗어 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북한에 있을 때도 관리소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그런 착각을 할 때가 많다.”
평생 자신을 가둔 김정일 정권이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물으니 “억울하다는 말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은 그 사회가 나쁘다는 생각은 든다”고 답했다.
갑작스럽게 자유를 찾은 그는 아직도 세상이 어렵고 낯설기만 하다. “지금으로써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긴다. 아무것도 접해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목적도 정하지 못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빛 속에서 아직도 수용소 안에 갇혀 있을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