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팔려가고…나는 창녀촌 지키는 조폭으로

▲ 공안에 체포된 탈북 여성 (기사 내용과 무관)

북한에서 돈이 다 떨어진 나는 중국 연길 친척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엄마는 또 사라지고 안 계셨다. 친척 분은 천진에 엄마가 돈 벌러 가셨다고 했다. 2년 만에 찾아왔으니 당연한 거라 생각했지만, 조금 허탈했다.

그런데 곧 엄마와 통화할 수가 있었다. 친척 분은 엄마와 통화를 하시더니 나보고 집에 잘 왔다며, 이젠 엄마 계신 곳으로 가라고 말씀해 주셨다. 난 기쁘게 “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주신 말씀이 충격이었다.

“그런데, 재훈아, 너네 엄마 시집가셨다.”

“예?”

좋은 한족 분이랑 결혼해 지금 살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팔려가셨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길림에 도착해 어느 호텔에서 처음으로 의붓아버지를 만났다. 기분이 그렇게 묘할 수 없었다. 싫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난 그 분을 따라 나섰다. “아들이 좀 크구나”라며 그 분은 날 데려가셨다.

길림성 퉁화시 휴황현. 기차, 버스를 여러번이나 갈아타고 깊고 깊은 산골로 찾아갔다. 엄청나게 낙후된 농촌이었다. 시집을 다시 가시려면 좀 좋은 데로 가시지, 하필 이런 곳으로 오셨나 생각했다. 허무했다.

옆에 앉아 계시던 후줄근한 옷차림의 한족 의붓아버지는 날 달래려고 계속 애를 썼다. 먹을 걸 주고, 안 받으면 한참 담배를 피다 나에게 다시 권하고. 그러기를 계속 반복했다. 상한 기분에 상대를 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옥수수를 들이밀며 먹으라고 재촉하는 그 분이 그래도 착한 분이란 건 알 수 있었다.

2년 만에 처음 본 엄마는 임신 중이었다.

그땐 정말 미쳐버리는 줄만 알았다.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친척집에 얹혀 살기 부담스러웠던 엄마는 천진에 일하러 갔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일하던 일터 사장이 엄마를 팔았단다. 울분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집 갈 바에는 좋은 사람이랑 살지 왜 여기냐며 소리 질렀다. 엄마는 이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착한 사람이라며 날 달랬다.

그때부터 난 어쩔 수 없이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의붓아버지는 착하신 분이었고, 생활은 평화로웠다.

그때부터 난 목동이 되어 소 떼를 몰고 언덕배기나 산골짜기를 쏘다녔다. 소를 방목해 놓고 한가롭게 햇빛을 쬐던 날들이 이어졌다.

나 때문에 북송 당하신 어머니

어린 나이에 나는 산에서 무술이나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16살이었다. 마침 중국 무술영화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난 동네 애들이랑 같이 무술 연습을 했다.

홍콩 영화에서 조직 폭력배들의 이야기를 보고 나는 남자들만의 세계에 환상을 품었다. 그리고 목동 친구들한테 우리가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냐며, 선동하는 말을 자주 했다. 목동들은 좋아하며 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내에 목동들을 데리고 놀러 갔는데, 영화에서 보던대로 나이트 클럽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곳에서 시비가 붙어 상주하던 조직폭력배들과 싸움이 붙었다. 영화와 실전은 역시 달랐고, 무술을 단련했다 해도 통할 리가 없었다. 또 우리는 맨손으로 싸웠는데 그 쪽은 각종 흉기를 들고 때리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한창 그렇게 나이트 클럽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을 때, 그만두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 우두머리였다.

그는 “네가 이 곳에 온 목적을 안다. 내 아래에서 일하라”고 말했다. 영화 속 모습이 현실로 되는 것만 같았다. 난 이제부터 내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환상과 함께, 흔쾌히 수락했다.

그 이후 난 그 지역 창녀촌을 지키는 조직폭력배가 됐다. 소위 말하는 양아치였지만 그때는 나쁜 짓이라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몇 번의 싸움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난 잘 나가는 폭력배가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조직폭력배의 환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창녀촌을 지키던 어느 날, 40 명 가량 반대파들이 와서 우리 파의 창녀들을 납치하려 했다. 10명 뿐이었던 우린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패해 흩어지고 말았다. 난 가슴에 칼을 맞고 낯선 농촌 집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소란이 컸던지, 경찰이 나서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내 주변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우리 어머니도 포함되고 말았다. 그 일 때문에 우리의 신분이 탄로났고 어머니는 북송되었다.

집에 돌아가서 보니 어머니가 안 계셨는데, 조사 중에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드러나 북송됐다는 것이었다.

비참하고 원통했다.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 때문에 북한으로 다시 가셨다니,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그래서 심양 기차역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혔을 때, 난 내가 북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결국 나도 북송됐다.

마지막 탈출

구류장에 갇혀 있으니 보위부에서 나를 가만 둘 리 없었다. 계속해서 구류장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 병으로 인해 잠시 허가를 받아 집에 갈 수 있었다. 중국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몸이 엉망이었기에 조사를 더 이상 받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니 엄마는 너무나 고생해서, 또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나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리 없었다. 나는 어머니께 용서를 빌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중국으로 탈출하자고 말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두만강을 건넌 게 2002년 겨울이었다. 눈보라가 정말 많이 몰아치는 두만강 너머 중국 들판에서 어머니와 나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며 빌고, 또 빌었다. 어딘가 신이 있다면, 제발 들어주길 바라면서.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정말 제발, 제발 다시는 잡혀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큰 절을 하고, 우린 눈보라 속에서 택시를 타고 무사히 연길로 들어갔다. 내 중국어가 통했던 탓일까, 아니면 날씨가 너무나도 춥고 열악했던 탓일까. 검문하던 공안은 내가 중국말로 말하자 그냥 통과시켜 줬고, 우린 무사히 연길에 입장했다.

그 뒤 난 천진에서 용접 일을 해서 성실하게 돈을 벌었고, 2005년 번 돈을 이용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야 이제 안심을 하며 살고 있다.

지금도 어머니와 옛날 일을 조금이라도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신다. 나라고 어떻게 눈물없이 그 일들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까지 이해해 드릴 수 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누군가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치료되고, 추억으로 미화된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엄마와 이야기할 때마다, 내게 있어서 아픔은 더욱 선명할 뿐, 미화되어 간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통일이 된다 해도 이런 아픔이 가실지 난 알 수 없다. 다시 아버지를 만나도 온전히 웃으며 만날 수 있을까? 주체사상이 뭔지 난 모르지만, 난 그 사상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사상이 풀리지 않는다면, 설사 통일이 되어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거 같다. 그저 슬플 뿐이다.(끝)

/정재훈(가명) 2005년 입국, 서강대 중어중문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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