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손으로 도시락곽에 벼이삭을 훑었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농장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빚더미 뿐이라 악이 난 사람들은 본격적인 추수철을 앞두고 농장 곡식을 도적질하기도 했다. 또 아이, 늙은이(노인) 할 것없이 총동원해서 가을이면 이삭줍기를 했다.


이삭줍기를 하면서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논에 쌓아놓은 볏단들에서 벼 이삭을 마구 잘라가기도 했다. 나도 가끔 친구들과 벼 이삭을 주으러 들에 나갔다가 볏단에서 벼이삭을 훑거나 잘라오기도 했다.


가위나 낫으로 벼 모가지만 잘라 50㎏짜리 마대에 가득 채우면 백미 20㎏이 나오곤 했다. 또 벼이삭을 마대 안에 밀어넣고 늄도시락 뚜껑으로 훑으면 벼가 떨어지는데 이런 방법으로 한 자루 훑어 정미하면 37㎏의 쌀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들키지 않게 잘 해야지 까딱 잘못해 감시하는 농장원이나 리 간부들의 눈에 걸리는 경우에는 정상적인 배급마저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도시 학교 아이들은 봄이나 가을이면 무조건 집체적으로 농촌동원을 나오는데 우리 같은 농촌 학교에서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지원을 다녔다. 


농촌 아이들인 경우에도 집이 잘 살거나 부모가 힘이 있으면 농촌동원을 나가지 않는다. 농촌에서 힘있는 부모들이라면 대체로 농장 간부이거나 작업반장, 분조장 등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식을 농촌동원에서 면제시켜주는 대신 가을이면 자신의 능력이 닿는대로 담임교원의 집에 물질적인 방조(지원)를 아끼지 않는다.


소학교 같은 반 김선희(가명)는 아버지가 남새 분조장이어서 해마다 가을이면 담임 교원의 집에 김장용 배추와 무를 제일 좋은 것으로 각각 200㎏씩 보내줬다. 


또한 한정수(가명)의 아버지는 담배농장 분조장인데 담배 수확이 끝나면 담임 선생님의 집에 독초 담배 100㎏(1㎏에 4500원)을 넣어었다. 다른 옥수수분조장들은 가을이면 옥수수 200㎏을, 일반 농장 간부들은 벼만 200㎏(1㎏당 700원, 정미쌀 2500원)씩을 넣어준다. 농촌학교 교원들은 이런 재미에 시골에서 교사를 하는 것 같다.


일부 아이들은 집에서 해주는 제한된 밥을 먹다가 가끔 먹고싶은 간식을 먹기 위해 집에서 옥수수를 비롯한 알곡을 채서(훔쳐서) 바꿔먹기도 한다. 


옥수수 네 이삭이면 꽈배기(과자) 1개를 바꿔먹을 수 있다. 또 옥수수 4개(알로 1키로)로 껌 두 개를 교환했다. 심지어 아버지나 자식들이 술을 외상으로 먹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집도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기 위해 콩(1kg 1800원, 기름 1병 2400원)이나 기장, 좁쌀, 옥수수 등으로 바꿔먹는 것이 1년에 100㎏ 정도 될 것이다.  


우리 동네 영수(가명)는 부모님 몰래 간식을 외상으로 먹은 것이 쌓여 옥수수 100㎏을 갚아야 하는 형편이 됐다. 꽈배기 장사꾼은 한 참이 지나 농사꾼들이 제일 넘기 어려운 보릿고개에 영수의 어머니를 찾아와 당장 옥수수 100㎏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당한 영수 어머니는 너무 기가 막혀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아이에게 외상을 주고 이제 와서 부모한테 생색이냐’고 장사꾼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농촌사람들은 기름도 한달에 보통 반병 정도밖에 먹지 못한다. 기름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기름을 사먹을 수 없다. 농촌사람들은 주로 옥수수눈으로 짠 기름이나 해바라기기름, 깨기름을 주로 먹는다.


또 기름짜고 나오는 대두박(콩깻묵)으로 밥을 비벼먹기도 한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니까 아이들 상당수가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농촌 사람들은 밥 이외에는 다른 영양 보충거리가 별로 없다. 보통 농촌 집들에서 식구에 관계없이 한 달에 소비하는 기름은 반병 정도다.  부족 되는 영양보충을 전부 밥으로 하려 한다. 그러니 당연히 먹는 밥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평균 1인이 한 끼에 옥수수쌀로는 400g, 흰쌀로는 200g 정도 밥을 먹는데 이렇게 계산하게 되면 우리 집은 여자인 내가 좀 적게 먹는다고 해도 하루 평균 잡아 3㎏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한다.


한 달이면 90㎏, 1년이면 1100㎏ 정도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하는데 농장에서 분배로 받는 옥수수쌀은 기껏해야 200㎏, 정미된 백미 200㎏, 모두 해야 400㎏에 불과하다. 이것 으로 일 년 동안 먹고 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렵게 살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해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북한에서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살림살이만 하다가 2009년에 탈북했다. 가난과 독재에 신음했던 내가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은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남이나 북이나 살기 어렵기는 똑 같은 거 아니냐’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이 느끼기에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런데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남한과 강냉이밥도 부족해 배를 곯고 살아야 하는 북한 중에 어디서 살고 싶냐고 물으면 ‘남북이 마찬가지’라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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