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뇌수술을 받았다고 대한민국의 정보 총책임자인 국정원장이 국회청문회에서 밝혔다.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촛불시위, 지칠 줄 모르던 지난 여름의 더위가 물러가고 있는 가을의 문턱에 찾아 온 이 소식은 이제 한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언론들은 김정일의 병세에 따라 이후 북한의 통치체제의 변화를 점치는 한편, 북한의 만일의 급변사태에 정부가 만전을 기해줄 것을 당부하는 논설로 봇물을 이루고 있다.
물론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북한 내부 동향에 대한 정보 수집을 늘리는 등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김정일의 투병사태와 관련하여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즉 김정일이 병세를 회복하여 다시 “장군님”으로 복귀하든, 아니면 지속적인 투병의 와중에서 서서히 권력의 중심에서 사라지든, 혹은 김정일의 퇴진 이후 군부 간에 권력다툼으로 북한 내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도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 가능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헌법에 의거할 때 북한 전체가 대한민국의 영토에 속하고 북한주민 역시 한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북한정권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 때문에 한국이 북한 내부에 개입하기는 힘들다. 만일 한국이 개입할 수 있다면 유엔의 결의에 의해서 다른 국가들과 함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한국은 현재의 상황 하에서는 북한의 인민 혹은 북한의 권력층이 스스로 독립적인 국가임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편입될 것을 요청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북한에서 한국이나 중국으로 난민이 폭증하여 사실상 북한이 국가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 혹은 1990년 동독 의회가 스스로 국가해산을 의결하였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과연 한국정부가 그 시대정신과 흐름에 맞추어 천추의 한이 남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서는 통일의 방식과 목표에 대하여 국민들 간에 의견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은 통일을 비경제적으로, 따라서 비현실적인 사태로 보고 있다.
이념 지형에 따라 통일에 대한 생각도 천차만별이다. 한국에서 진보진영은 북한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연방제를 선호하고 있고, 또 보수진영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국의 친북좌파는 김정일 체제의 종말이 다가오더라도 통일비용에 대한 엄청난 왜곡, 통일 후 “자본주의에 의한 북한주민의 노예화” 등을 이유로 북한체제의 유지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꾀할 것이다.
김정일 시대, 서서히 혹은 급격히 사라질 것
따라서 한국은 이제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현실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하며, 이러한 논의를 통해 국민들이 통일의 역사적 필요성과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 통일에 있어서 문제점은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의 발생이 아니라, 실은 천문학적으로 통일비용을 썼기 때문이라는 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통일 후 독일정부는 구 동독지역의 주민을 사실상 국민의 세금으로 먹여 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지역에서 생산성은 향상되지 않고 지금까지만 2조 달러가량의 돈을 동독지역에 퍼붓고도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지원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온 것이다.
반면에 구서독과 같은 돈 많은 형제를 갖고 있지 못했던 동구의 나라들은 시장경제에 자생적으로 적응하여 “오늘 보다 내일이 더 낫다”는 희망을 갖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남북한이 하나의 주권국가가 되어도 북한이 독자적인 경제지역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한국의 북한에 대한 합리적이고 적절한 지원이 있으며, 또 북한주민들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개선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통일방안을 창안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통일 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한국이 동북아의 국제질서에 지속적 안정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주는 외교정책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통일은 한국 내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일치된 견해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통일의 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합의는 북한체제가 급격히 변화하는 시기에 정부로 하여금 가장 적절히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당시 서독정부의 시의적절한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국민은 북한의 급변사태에 정부가 만전을 기해줄 것을 바라는 만큼, 앞으로 반드시 찾아올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안에 우선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김정일이 다시 공식석상에 나온다면, 아마도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 뇌수술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김정일은 늙고 수척하며 기운이 쇠한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복심이라 알려진 박지원 의원은 ‘개혁 개방주의자”’ 김정일이 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정당성도, 현실성도 없는 망상에 가까운 희망사항일 뿐이다.
세월을 보고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허망한 희망이듯, 이제 김정일의 시대는 서서히 혹은 급격히 사라질 것이다. 광기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