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낳은지 10일만에 몸 안준다고 때려”

▲ 중국 공안에 체포된 탈북 여성(기사 내용과 무관)

재중 탈북 여성들의 인신매매 피해는 탈북 행렬이 이어지던 1990년대부터 10여년 이상 지속돼 온 문제다.

초기에는 동북 3성을 중심으로 팔려가던 여성들은 중국 공안의 단속이 강화되며 황하강 이남의 남방지역 및 서부의 내몽골까지 광범위하게 팔려가고 있다.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탈북자 지원 NGO의 한 활동가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탈북 여성들에 대한 각종 인권유린은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라며 “여성들이 점점 중국의 산골 오지로 팔려가기 때문에 그 숫자나 상황을 파악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유엔 및 국제 인권단체들은 매년 펴내는 북한인권실태 보고서를 통해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탈북 여성 인신매매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전편 기사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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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23세)-2006년 탈북, 평양 소재 대학 중퇴

안미란(43세)-2003년 탈북, 함북 회령 출신, 인신매매 피해

최경자(35세)-1997년 탈북, 함남 함흥 출신, 조선족 남편과 결혼

이은희(39세)-2000년 탈북, 평북 신의주 출신, 달리기 장사

강순녀(40세)-2002년 탈북, 양강도 혜산 출신, 인신매매 피해


◆”맞아서 죽느니 도망이라도 가야…”=중국의 농촌 지역으로 팔려간 대부분의 탈북여성들은 남편의 구타와 성적 학대 등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다른 곳으로 되팔린다. 이때 탈북 여성들이 당하는 폭력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안미란 씨가 팔려간 농촌 마을에는 총 12명의 북한 여성들이 살고 있었다. 안 씨도 물론 남편으로부터 맞으며 살기는 했지만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생활이었다고 한다.

“한족(漢族)한테 시집간 여자가 있는데 몸을 안 준다고 옷을 벗겨놓고 몸을 꽁꽁 묶어 때렸다. 애 낳은 지 10일 지난 아내에게 몸을 요구하다가 거부하니까 때리는 경우도 봤다. 대부분이 맞고 사는데, 맞는 고통이 없으면 정신적 고통이 크다. 북한에서 왔다고 업신여기고 너희들(중국인 지칭) 하란 대로 해야 한다. 그 수모는 말로 할 것도 없다.”

탈북자 지원 활동가들에 따르면 최초로 팔려간 집에서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비율은 20%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번 팔려간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돈 얼마짜리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다. 그 집의 성인 남자와 모두 잠자리를 해야 하기도 하고, 남편이 삼촌에게, 이웃에게 되파는 경우도 있다.

안 씨는 “내가 아는 한 여자는 19살에 중국에 와서 장애인한테 팔렸는데, 술만 먹으면 때리길래 도망을 쳤다고 한다. 돈도 없고 길거리에서 헤매고 있는데 운도 참 없지. 그런 사람(인신매매꾼)을 또 만나서 또 팔려갔단다. 거기는 더 살 곳이 못되길래 도망쳐서 원래의 남편한테 돌아갔다더라”고 말했다.

비교적 착실한 한족에게 팔려갔다던 최경자 씨도 남편이 술만 마시면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농촌에 사는 한족 남자들은 장가가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여자가 도망 갈까봐 경계를 무섭게 한다. 집안의 살림도 안 맡기고 돈도 안준다. 낮이고 밤이고 감시한다.”

“남자는 착했는데 술을 많이 먹고 도박을 좋아해서 살림하기가 힘들었다. 언젠가 고치겠지라는 생각으로 참아보려 했지만 3년을 살아도 바뀌는 게 없길래 도망쳤다. 친척들한테는 도망간다고 말했다. 그동안 내가 당했던 것을 아니까 말리지도 못하더라.”

강순녀 씨도 딸을 찾기 위해 팔려간 시골 마을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으니 딸 찾을 때까지라도 여기에서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자 양반도 여자니까 알겠지만 정말 죽어도 싫은 남자가 있지 않느냐. 그 사람 얼굴을 딱 보는 순간 도저히 저 사람하고는 못 살겠다는 맘이 들더라.”

강 씨는 그 집에서 나오기 위해 16일간을 굶었다. “굶는 거야 죽기보다 더 싫었지만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내가 하도 못살겠다고 하니까 친척들이 그 남자한테 때려서 버릇을 가르치라고 일렀던 모양이더라. 어느 날 창문으로 마당 밖을 내다보니 회초리 나무를 깎는 거 아닌가.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더니, 그걸 들고 방으로 들어와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회초리로 때리다 부러지니까 빗자루로 때렸다. 그것마저 부러지니까 바닥에 눕히고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중국인 남편으로부터 맞는 날들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하루는 신발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속에 돈 5000원을 숨겨놨었다. 신발이 튿어져서 돈이 나오자 더 약이 올랐던지 미친 듯이 때리더라. 이대로는 맞아 죽겠다 싶어 맨발로 도망쳤다. 멀리 도망갈 수 없으니 마을 어귀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그 자가 동네 친척들 다 불러내서 오토바이를 타고 온 마을을 다 뒤졌다. 결국은 다시 잡혀갔다.”

성관계를 거부했던 강 씨는 중국인 남편으로부터 강제로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누구한테 차마 꺼내보지도 못한 얘기”였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상상하기조차 괴로운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내가 하도 강짜(억지)를 부리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더니 나를 팔았던 브로커에게 연락해서 다시 데려 가라고 했다. 그래서 조양(차오양.朝陽) 시내에 사는 또 다른 남자에게 팔렸다.”

◆ 강제 북송…”차라리 중국 감옥이 낫더라”=농촌에서 도망쳐 나오더라도 탈북 여성들이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직장은 없다. 식당이나 청소, 보모 일을 구하긴 하지만 그마저도 월급을 적게 받거나 공안의 단속을 걱정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유흥업소에 빠지는 경우도 많은데 안마방이나 노래방, 다방 ,성매매 업소 등에서 일하게 된다.

강 씨는 “조선(북한) 여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식당 아니면 노래방, 술집이다. 그러나 식당은 말도 안 통하고 친척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브로커들 하고 돈을 나눠가지는 식으로 술집을 소개 받는다. 그런 데라도 나가야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조선 여자들은 돈을 많이 떼인다”고 설명했다.

농촌에서 도망 나온 안 씨는 심양에서 교회의 도움으로 보모 일을 구하게 된다. “보모로 일하더라도 북한 여자인 걸 알면 몸을 요구한다. 아픈 여자를 간호하러 갔었는데, 그 남편은 공안대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몸을 요구하는데 열흘 만에 몸이 비쩍 말라서 나왔다.”

탈북 여성들은 중국 공안에게 잡힌 후 북한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도 성적인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안미란 씨는 알고 지내던 탈북 여성이 잡히면서 같이 단속에 걸리게 됐다. “심양 구류소에 들어갔는데 중국 감옥도 옷을 다 벗겨서 검사한다. 중국인 조선족이 잡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 여자들만 그렇게 홀딱 벗겨 놓는다. 숨겨놓은 돈을 찾으려고 그렇게 검사한다.”

강순녀 씨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국경지역으로 이동하다가 중국 공안의 검문에 걸렸다.

“중국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한어(중국어)를 해야겠기에 평소부터 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중국 공안들이 짐을 뒤지다가 한어를 공부하는 책이 나오니까 나더러 평범한 탈북자가 아니라고 몰아세우는 거다. 한마디로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가 아니냐면서. 의자에 묶어놓고 계속해서 때렸다. 말할 게 없는데 계속 때리니까 힘들었다. 지금도 팔에는 그때 맞아서 생긴 시퍼런 멍이 남아있다.”

북한 보위부 검사에서는 강도가 더욱 심해진다. 안 씨는 “조선에서는 남자 간수들이 여자의 은밀한 곳에 손을 넣고 돈이 있는지 검사한다. 여자는 사람도 아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여자들은 생리까지 멈춘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삼시 세끼 이밥(쌀밥)도 주는데, 조선에서는 돌이나 쥐똥이 들어있는 통강냉이밥도 하루에 한 번 준다. 이렇게 6달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 사람 형태가 없어진다. 아랫배만 불룩 나오고, 뼈에다 가죽만 얹어놓은 형태다. 먹는 게 없으니까 영양실조가 와서 죽는다. 일의 강도도 너무 세다.”

최경자 씨는 그래도 최근에는 예전보다 탈북 여성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졌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간수들이 남자여서 여자를 괴롭혔으나, 이제는 모두 여자로 바뀌었다. 내가 잡혀 갔을 때는 임산부들을 다 일어나라고 했다. 애기를 강제로 없앤다는 소문이 돌았으니까 손 드는 여자가 없었다. 그런데 임산부들 진찰도 해주고 특별이 대우해 줄 테니까 겁내지 말고 나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임산부들은 따로 관리를 잘 받았다.

탈북자 지원 활동가는 “조선족 사회가 북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관대함을 완전히 상실했다. 직계가족이 아닌 이상 도와주지 않는다”면서 “또한 송환 이후 북한 당국의 탈북자 처벌 실태가 알려지면서 탈북 숫자가 압도적으로 줄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