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목화’, 보위부 강요로 첩자노릇

내 나이 70이 넘어 하느님 앞에 불려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죄를 물으신다면 보위부의 첩자가 돼서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받게 한 죄를 실토해야 할 것입니다.

월남자 가족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생 동안 북한에서 마음 놓고 앉을 자리,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던지 짐짝의 꼬리표처럼 ‘월남자의 딸’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녔습니다. 언제나 나는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에 대한 동태파악 강요

30여년 전, 자강도 00군 경공업 공장에서 일하던 때 였습니다. 정치보위부 담당지도원이 난데없이 저를 찾았습니다. 항상 감시 대상으로, 주목 대상으로 몇 십 년을 살아온 저로써는 죄 지은 것이 없어도 가슴이 쿵쿵 떨렸습니다. 보위부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필시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혹시 나의 발언에서 잘 못 된 것이 없는가 긴장되었습니다. 담당지도원실로 찾아가니 지도원이 하는 말이 앞으로 나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자의 딸이기 때문에 특별히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협박 반, 설득 반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말만 잘 들으면 응당한 보상이 차려질 것이라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런 일은 내 양심이 허용되지는 않으나, 항상 출신성분 때문에 설움을 겪어 왔던 저는 거절 할 수 가 없었습니다.

담당지도원이 준 임무는 공장 내 동요대상들에 대한 동태를 파악해서 보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서도 이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손가락 도장도 찍었습니다. 내 암호는 ‘목화(木花)’였습니다.

처음 임무수행은 간단하고 쉬운 일이 많았습니다. 공장의 작업반 사람들의 근무태도, 언행, 작업반장의 행적을 기록했다가 한 달에 두 번씩 지도원에게 보고하는 일이었습니다.

보고서를 잘 쓴다며 좋은 평가도 받았습니다. 매월 쌀 구입 전표도 받고 선물도 받았습니다. 생활에 보탬도 되고 내 자신이 감시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할 수록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을까? 지도원의 강요를 뿌리치지 못했다면, 겉으로 건성건성 입장이나 지켰으면 될 것이지 과업을 준다고 전심전력을 다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보위부에서는 높은 기능을 소유한 능란한 일꾼이란 찬사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저는 파렴치한 나의 모습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 저에게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밀고 때문에 파탄 난 윤씨네 가정

같은 동네에 살던 윤씨는 황해도 지주의 딸로 자라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하고 나자, 부양 연령이 안 되어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윤씨는 하는 수 없이 세대주가 되어 연령이 될 때까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 당에서는 이 노친의 뒤를 파기 시작했다. 지주의 딸이었고 생활에 불만도 많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윤씨의 뒤를 담당한 당 지도원이 윤씨의 간단한 이력자료를 적은 학습장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당지도원 아들이 이 학습장을 가지고 윤씨네 집 아들과 공부하려다 윤씨에게 발견되어 큰 싸움이 일었습니다. 윤씨는 당 지도원에게 격하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보위부에서는 그 당지도원이 실패한 대상을 나에게 맡겼습니다. 나는 작업반도 옮기고 그녀와 같이 일에 배치되었습니다. 나를 그녀의 옆에 접근 시킨 것이었습니다. 나는 양심에 자책감을 가지면서도 내 살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그녀의 행적을 수집하여 비밀 지점에 가명 수표로 연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리수희
1931년 자강도 출생
1996년 탈북
현재 중국 長春에 거주

두 달 후에 윤씨는 도 정치보위부에 체포 되었습니다. 공장 당과 당 지도원에 대한 불만들을 내가 모조리 지도원에게 고해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윤씨가 끌려가고 나자 나는 더는 이런 노릇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공장 작업반 사람들에게 윤씨가 끌려간 것은 나 때문이라고 비밀을 노출 시켰습니다.

비밀을 노출 시킨 것을 알게된 보위부지도원은 나를 불러다 놓고 가진 쌍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쌍년아, 자본주의 사회 같으면 네 년은 총살감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떨리지도 않고 그저 생명만 남겨 주시오 하는 식으로 버텼습니다. 결국 그 후에 저는 그 공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 후 이 지도원은 우수한 사업 평가를 받아 공장 정치보위부 비서로 올라갔습니다.

전 주민들을 첩자와 죄인으로 내모는 사회

저는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가 없어서 윤씨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윤씨의 어린것들은 저를 보자 반가워서 내 손을 꼭 잡았습니다. 제 엄마 생각이 나서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자기 엄마와 같이 한 작업반에서 일했다며 그들은 내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내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이 어린 것들에게 불행을 던져준, 도저히 용납 못할 나의 죄. 그들을 달래며 작은 것은 신발을 사주고 큰 것은 학습장을 사서 쥐어주고 헤어졌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면서 헤어진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윤씨네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내가 남의 자식들에게 몹쓸 짓을 한 죄로, 나도 내 아들과 헤어져 생사도 모르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북한 땅은 모든 주민들이 첩자가 될 수도 있고 모든 주민들이 언제라도 죄인이 될 수 있는 그런 곳 입니다. 이웃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는 제 피붙이도 서로 믿지 못하게 하여 서로서로 감시하고 트집을 잡아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빼앗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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