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동양평화론’과 빌리 브란트 ‘동방정책’의 공통점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동양 삼국의 ‘수평적 연대’를 통한 ‘세력균형’과 높은 수준의 ‘다자간 통합’의 방법론이 여순의 ‘동양평화회의’를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세력균형’과 ‘다자간 통합’의 논리가 21세기 한반도 평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박근혜 정부의 통일구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검토해야 할 대상은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룬 독일의 사례이다. 따라서 본 내용은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추진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이 대동구권 ‘세력균형’ 정책과 ‘헬싱키 프로세스(Helsinki Process)’라는 다자간 통합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제시했던 지속가능한 평화의 방법론이 이상주의적 논의가 아닌 얼마나 현실성 있는 대안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사실 1910년 안중근이 밝힌 당시 동양평화에 대한 철학과 구상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정립되어 간 유럽통합 사상과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유럽통합사와 독일통일 과정을 비교할 때 그가 초국가적 지역통합에 있어서 얼마나 뛰어난 선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독일통일의 출발점인 ‘동방정책’을 고안한 빌리 브란트는 독일통일을 동서독 내부의 문제만이 아닌 전 유럽의 통합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즉, 통일문제를 동서독의 공간이라는 협소한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일차적 목표로 두고 이를 통해 독일통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브란트 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전임자인 아데나워(Konrad Adenauer)가 독일통일을 힘의 우위를 통한 현상타파로 인식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브란트 정부는 동서 유럽의 긴장완화를 통한 세력균형 정책을 외교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브란트 정부는 먼저 소련과 폴란드,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차례로 관계정상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1970년 8월 서독은 소련과 모든 무력의 포기와 현 유럽국가의 국경선을 불가침으로 규정한 ‘모스크바 조약’을 맺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폴란드와 오데르-나이세(Oder-Neisse)라인을 국경선으로 인정하는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73년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관계조약을 통해 1936년 당시 나치 독일과 체결했던 뮌헨협정의 무효를 확인하였다.

1970년 8월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자 동서독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동독은 서독의 대화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12월 12일 ‘동서독기본조약’ 체결은 동방정책을 추진한 브란트 정부에게 독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발판이 마련해 주었고, 동독 역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서 자국의 국경선을 인정받게 되었다.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동서독은 각 분야에서 실질적인 관계 개선을 도모해 나가기 시작했다. 경제, 문화, 기술, 언론, 인적교류, 보건환경 법률, 정보교환, 우편과 통신, 문화, 스포츠, 환경 등의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협정을 체결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독은 대동구권 외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동독을 개방으로 유도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동서유럽의 긴장완화를 통한 서독의 ‘세력균형’ 정책은 동서유럽 간의 진영을 초월한 ‘다자간 통합’의 길을 제공하였다. 동서유럽의 긴장완화를 위한 이와 같은 서독의 헌신은 1973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출범의 밑거름이 되었고, 1975년 미국, 소련, 서독, 동독 등 동서 양진영 35개국이 참여해 안보협력, 경제협력, 인권협력, 인도적 지원 등 10개 원칙에 대한 ‘헬싱키 프로세스’를 통해 유럽통합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출범시켰다. 1989년 냉전의 종식 이후 1990년 53개국 회원국이 참여한 유럽안보협력회의 파리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이 채택되었고, 1995년 유럽통합의 전신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발족하였다.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의 관점에서 본 독일통일의 실현구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독은 통일의 대외적 환경 조성에 먼저 힘을 쏟았다. 통일을 중장기적인 과제로 인식하였고, 양독일에 영향을 미치는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과의 긴장완화를 먼저 추구하였다. 미국의 협조 없이 단독으로 동구권 국가들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여 1973년 유럽안보협력회의(CECE)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둘째, 동서독 간의 교류 협력을 촉진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동독의 국제적 개방을 이끌어냈다.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을 시작으로 상호 교류를 확대하였고, 동서독 동시 유엔가입과 동독-미국 간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동독의 대외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셋째,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을 묶는 포괄적 전략을 추진하였다. 동서유럽의 긴장완화 정책을 통해 양독일의 분단을 극복하고 이를 토대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같은 다자간안보협의체 설립하여 유럽통합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아래 <그림>은 ‘세력균형’과 ‘다자간 통합’의 원리가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어떻게 적용되어 발전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1970년대 서독의 대동구권 외교를 시작으로 1990년대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으로 마무리 되는 과정에서 ‘헬싱키 프로세스 (Helsinki Process)’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호르스트 텔칙(Teltschik)은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면서 “서독이 유럽 통합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통일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독일통일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유럽통합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결국 서독의 세력균형 정책과 유럽통합을 위한 유럽안보협의체의 과정은 독일통일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으며, 독일통일의 완성은 또한 유럽통합의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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