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원도 “도둑하고 좀 나눠 먹어라” 핀잔

나는 가끔 공개석상이나 특강이 있을 때 남과 북에 대해 “남쪽은 배가 너무 불러 요지경이 됐고, 북은 배가 너무 고파 저 지경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면 과연 북한 주민들은 얼마나 배가 고픈가? 언뜻 생각해도 굶어 죽는 인민이 엄청난 숫자였으니까 대충 짐작은 갈 것이다.

우리들도 해방 직후, 그리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참으로 비참한 시절이 있었다. 한국군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는 돼지도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건더기는 없고 국물만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는 기름끼도 많고 꽤 먹을 것이 있었다. 이 잔반도 뒷배경이 있어야 얻어먹을 수가 있었고 부대와 멀리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필자가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길거리에 지나가는 미군을 보면 자연스럽게 “헬로우! 찹찹! 미 유어 하우스 보이?” 일단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손부터 내 밀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UN군이 아니었더라면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모시고 우리들도 지금의 북한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김일성 사망 때 우리들도 땅을 치고 통곡을 며칠이나 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6.25동란 중 <세계기독교 선명회>(World Vision)는 1953년 5월부터 전쟁고아와 미망인 구호사업을 시작해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 기구가 오늘에 와서는 북한을 돕고 있으니, 조선이라는 이 땅은 월드비전과는 특별한 연분이 있는 것 같다.

‘90년대 중반 북한은 극심한 가뭄과 홍수, 겨울 한파까지 겪으면서 4년 동안이나 견디기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에 인민들의 고통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벽부터 풀을 뜯어먹고 사는 북한 주민들

낮에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으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기차철도를 따라 한없이 한 없이 가다 마을이 나오면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 풀 한 가닥, 곡식 한 톨이라도 흘릴까 배낭에 꼭꼭 싸서 허리가 90도로 휘도록 짊어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그 심정을 우리는 모를 것이다.

철로주변으로 가다 보면 석탄 덩어리라도 주워 배낭에 넣고 가니 그 무게가 얼마인가? 기차가 광산에서 석탄을 싣고 평양에 도착해 보면 그 석탄이 반은 없어진다고 한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또는 비탈을 오를 적마다 인민들은 석탄을 훔쳤고, 철도원들은 고향마을을 지날 때마다 적당히 석탄을 철로변으로 내던져 마을 인민들의 한숨을 달래줬기 때문이다.

북한에 도착해 아침 일찍 호텔 창 밖을 내다보면 새벽녘 날도 미처 새기 전에 뭔가 움직이는 사람들은 죄다 먹을 수 있는 풀을 뜯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나물이 아니고 짐승들이 먹는 풀을 뜯는 것이다.

수양버들 잎도 훑어가고, 대동강변 낚시질은 하루종일 한 마리도 안 잡힐 때도 있다면서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이름 없는 물고기 한 마리 잡아 푸성귀 많이 넣어 끓여서 식구들 먹이려고 낚시대도 아닌 장대에 줄을 달고 앉아 있다.

아낙네들은 강변 돌 틈에 다슬기라도 있나 싶어 거꾸로 머리 쳐 박고 조심조심 손으로 건져본다. 한 주먹 정도 잡았기에 “몇 시간 잡은 거냐”고 물었더니, 한 나절 잡은 거라고 힘없이 대답한다.

일요일이면 아파트에서 키우는 암탉 한 마리를 금이야 옥이야 가슴에 안고 풀밭에 나온다. 행동반경이 넓어야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는다고, 닭다리에 줄을 길게 묶어 놓고 닭 주인은 그 옆에 풀밭에서 뭔가를 뜯고 있다.

“남이 보면 수상하게 여기니 (먹을 것을) 여기다 놓고 가세요”

닭다리를 묶은 줄도 서너 가닥으로 너무 낡아 곧 떨어질 듯 보인다. 닭과 함께 먹이 나들이 나온 셈이다. 옛날에는 아파트에서 짐승을 키우지 못하게 했는데, 지금은 염소까지 키울 수 있다고 자랑이다. 닭도 먹을 것이 있으면 키울 수 있다. 일주일에 평균 3개의 알은 낳는다고 한다. 잘 먹어야 알도 매일 낳지.

그 옆을 보니 젊은 청년이 눈만 크게 보이는 아들을 안고 따뜻한 햇볕을 쪼이고 앉아있다. 가까이 가서 “엄마는 어디 가고 아저씨 혼자 아이를 데리고 나왔느냐”고 하자, 엄마는 남새(채소) 뜯으러 갔다고 한다. 아이가 너무 못 먹어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이다. 눈만 크게 튀어 나왔다. 청년 말이 먹을 것이 없어 어른이 굶는 것은 괜찮은데, 아이를 못 먹여 가슴 아프다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잠시 기다리게 하고 바로 옆인 보통강 호텔로 뛰어 갔다. 빵, 사탕, 우유, 과자, 맥주 두 깡 이렇게 사서 들고 혹시나 이 청년이 가고 없을까봐 걱정하면서 뛰었다.

맥주는 청년과 내가 한잔 마시려고 샀다. 다행이 오늘은 일요일이라 안내원이 자기 집에 잠깐 다니러 가고 없었다. 아이와 청년이 있던 그 자리에 사람이 안 보인다. 당황한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나무 밑에서 청년이 나온다. 아기 볼일을 보게 했단다.

그는 “남이 보면 수상히 여기니 그냥 두고 가주세요” 애원조로 나를 쳐다본다.

돈 10 달러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고 양해를 구하고 아기를 내가 안고 사진 한 장 찍었다. 아빠하고 아가도 한 장 찍었다. 청년의 처지를 눈치 채고 자리를 떠나면서 일요일 가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약속도 했다.

호텔 봉사원들 “외화 교환할 때는 저에게 하시라요”

내가 안 보이면 한두 달 후에 또 오니까 기다리라고 했다. 그 후 나는 그 아이를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 아이 지금쯤 얼마나 컸을까?

출국할 때는 그동안 찍은 사진은 무조건 전부를 인화하여 사전 검열을 받고 출국해야 하는데 그때 찍은 사진은 압수당하고 경고도 받았다.

호텔식당 봉사동무들은 서빙하면서 옆에 와서 귓속말로 “선생님. 외화교환 할 때 저에게 하시라요” 한다. 호텔 카운트에서 바꾸느니 이들에게 바꾸어 달러 장사하는 것을 도왔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지방에 가면 새벽 기차역 부근에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구걸하는 사람도 많았다. 외국에서 온 사람은 표가 나니까 옆에 와서 손을 내민다. 안내원이 소리치며 저리 가라고 해도 삐죽거리면서 힐끗 처다만 보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열차가 잠시 쉬는 역에서는 도둑 기차 타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법석이다. 우리도 60년대 초까지 도둑 기차 타고 이동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역에 도착하니 아낙네가 보자기에 뭔가를 들고 열차 칸으로 뛰어 들어 온다. 역무원과 뭐라 뭐라 속닥거리고는 다시 뛰어 내려간다. 역무원이 대기하는 방에 가 보면 병 종류가 제법 쌓여 있다. 분명 그 빈 병이나 먹을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안전원이 도둑 잡고도 “도둑하고 좀 나눠 먹으라”

북한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1950년대라고 상상하면 짐작이 갈 것이다.

저녁에 강변으로 산보 나가면 어둑어둑한 곳에서 불쑥 여인네가 뒤따라오며 “선생님 통조림 사세요. 배고파서 그래요.” “무슨 통조림인데요?” “함경도에서 온 성겝니다. 집에 명태포도 있고 말린 해삼도 있습니다.” 두 개를 샀다.

이튿날 아침 식당에 가서 먹으려고 따 보니 소금이 너무 많아 짜서 먹을 수가 없다. 산보 겸 저녁에 다시 그 자리에 나가 봤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니 여인이 뒤 따라오며 역시 통조림 사라고 한다. 한 개를 우선 샀다. 어둡지만 어제저녁 그 여인임엔 틀림없었다. 어제 밤에 두 개를 샀는데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다고 했더니 자기는 어제 밤에 여기에 나온 일이 없다고 한다. 내가 바보 되고 말아야지…

이 무렵 해외동포의 이산가족 집에는 도둑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미주지역에서 찾아온 가족들 집에는 여러 가지 물건도 많지만 달러도 주고 가니 이것을 노리는 바로 이웃 사람들이 눈독을 들인다고 한다.

잃어버렸다고 신고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현장에서 잡아도 “거 좀 노나(나눠) 먹어라!”고 안전원이 타이른다고 하니 분위기가 짐작이 간다. 옷이며 먹을 것을 주먹만한 자물통으로 철창 문짝까지 만들어 간수한다고 하니, 있는 사람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이산가족이 직접 와서 현금을 주고 가는 것은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은데, 송금이 되어 오면 은행에서 달러로 일시에 주지 않고 한 달에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도 북한 돈으로 조금씩 준다고 하니 괴롭기 이를 데 없다.

새로 산 TV, 당에서 빌려가서 안 가져와

친척 가족이 TV 한대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사 주고 갔는데, 그 다음 북한에 갔을 때 방문해보니 한 대 더 사 달라고 한다. 이전 것은 어떻게 했느냐 물으니, 당에서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줬는데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라고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데, 그냥 한대 더 사주고 가라는 말을 듣고 그 가족의 마음이 어찌 그냥 돌아 갈수가 있었겠나? 이런 일들이 허다하다고 했다.

그래도 깊은 산골은 나물이라도 있어서 풀죽으로 연명을 했다고 한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송피를 긁어 먹을 수도 없고 기동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인네는 그냥 그대로 죽어 갔다.

중국 심양에 서탑이라는 한인 타운에 가면 소위 말하는 꽃제비가 길거리에서 우리를 보면 태연히 따라와서 함경도 어디어디서 왔는데, 돈 모아 어머니 병 고치는데 써야 하니 돈 좀 달라고 졸졸 따라 다닌다. 너무나도 태연하다.

행동이 의심스러워 “어디서 먹고 자느냐? 몇 명이나 같이 있느냐? 한번 가 보자”고 했다. 이들은 아침밥은 식당에 말해 싸게 먹고, 점심은 그냥 이러고 다니면서 적당히 먹고, 그날 돈 좀 생기면 저녁은 배 불리 먹는다고 한다.

돈 줄 테니 숙소에 가 보자고 하니 달아나 버린다. 알고 보니 중국에 사는 조선족 아이들이 북한에서 왔다 하면 한국의 여행객들이 의심치 않고 돈을 잘 주니까 아예 이런 식으로 구걸을 한다고 한다.

가뭄이 심할 때 대동강 물을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군인들이 동원돼 물줄기를 논으로 돌려 보려고 하지만 장비가 부족해 인민들만 고생스러웠다.

배고픔! 이건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요즘 우리아이들께 과거 배고팠던 시절 이야기를 하면, “냉장고 열고 음식을 꺼내 먹으면 되지, 배고픈데 참고 왜 참는가”라고 묻는다고 한다.

안내원들도 함께 식사하고, 남은 음식은 꼭 싸서 가져가

북한에서 여행할 때는 차 안에 귀중품이 보이면 차 창문을 부순다며 뒤 트렁크에 가방을 넣게 한다. 평양 본역 앞 지하도에 가면 구걸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다. 돈 달라고 따라 오기도 한다. 어느 나라든 구걸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지만 여기는 온 사회가 구걸이다.

어려울 때니까 안내원들도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음식을 더 시키고 남은 음식은 꼭 싸 가지고 갔다.

200만 명이 굶어 죽어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땅. 국경을 몰래 넘어 중국 땅에서 방황하며 숨어 살아가는 북한형제들. 남한에만 오면 잘 산다는 기대감 때문에 목숨을 걸고 대사관 담을 넘어야만 하는 동족들. 어찌 말로써 표현을 다 하겠나.

요즘에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몇 년을 머물면서 아예 장기 작전을 한다고 한다. 먹을 것만 해결되면 교통 불편한 깊은 산골로 시집가 중국 사람이나 조선족이나 구별 없이 아이 낳고 살기도 하고, 그러다 기회만 되면 도망 나와 식당으로, 술집으로, 심지어 몸도 팔아가면서 돈을 벌어 모아 한국으로 보내 준다는 브로커에게 거금을 주고 한국으로 온다는 거다.

왜? 북한 사람이 중국교포도 아닌데 돈을 주고 한국으로 와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대한민국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 전 탈북자와 이야기할 자리가 있었다. 한국에 가면 정착금을 얼마 받으니까 그 돈에서 얼마를 주기로 하고 중국에서 누가 보증을 서고 한국으로 오는 계획을 세워 행동개시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탈북자가 전부는 이렇게 한국으로 한국으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돈이 없는 탈북자와 브로커가 이해가 맞아 일어나는 일이다. 조직도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돈 버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이런 방법으로 한국으로 오는 북한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우리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있겠지…

호텔 봉사원도 당간부 자식 아니면 안돼

그렇다면 우리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해답은 나와 있다.

UN난민 보호와 관련하여 UN의 힘과 자금의 후원 아래 중국에 수용소를 만들어 일정기간 수용하였다가, 한국으로 데려 온다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정부가 중국에 대한 외교적 노력이 있어야 되는데, 오히려 거꾸로 김정일 눈치를 보고 있다.

이들은 몇 명씩 모여 안내를 따라 밤을 이용하여 몇 개월을 걸어서 베트남까지 가서, 다시 또 다른 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오게 된다고 한다. 영화 같은 필사의 탈출 작전이다. 한편으로는 중국 심양 등지에서 몽골로 넘어가서 한국으로 오기도 한다. 사막을 건너야 하는 탈북자의 고충을 생각하면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과거에 전혀 볼 수 없었던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평양 안산각 호수가 숲 속에서 보이기 시작했고, 수선하는 신발을 보니 수리 불가능한 플라스틱 슬리퍼까지 수선해달라고 한다. 어떻게 수선할 거냐 물으니 “어떻게 해 봐야지요. 신겠다고 수선해 달라는데…” 그래서 얼마 받느냐고 물으니 “값이 어디 있습니까” 한다.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호텔식당에 취직하는 것은 고급 당원의 부인이나 자식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심지어 호텔 로비와 담배 재떨이 청소하는 것까지도 높은 사람들 자식이나 부인들의 몫이다. 여기에서 말 한번 잘못하면 당장 상부로 보고가 된다. 서로 눈치 보며 서로 경계하며 살아간다.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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