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걱정’이 ‘反평화세력’이 되는 세상

선조 25(1592)년 조정은 당파를 중심으로 권력분쟁이 극에 달해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국정의 방향을 잡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왜세(倭勢)가 위협적으로 팽창했지만 변변한 국방정책조차하나 제대로 내오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지배세력은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했다.

무사안일 속에 고식(姑息)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다. 16세기 말에 일본에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로 보내 사정을 살피게 하였으나, 당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의 보고가 상반돼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송하고 말았다.

당시 이이(李珥)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 분위기’에 젖어 그의 충언을 무시했다. 지배세력은 양반의 편당(偏黨), 정치 기강이 해이한 채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이 심해지자 민심이 황폐해졌다.

조정에서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한다며 원성만 높였다.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狀啓)를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다.

국군 통수권자가 ‘군대에서 썩는다’ 선동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당파 싸움으로 기강이 헤이해지고 전력증강이 부진하자,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을 진행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계획을 공고히 했다.

이렇게 해서 1592년 4월 왜군 700여 병선이 부산포를 침략한 이후 1598년까지 총 7년 동안 전쟁이 지속됐다. 전란을 겪은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전말이다.

선진문물 수용을 소홀히하고 평화 분위기에 젖어 적의 위협이 턱 밑까지 달했는데도 당쟁에만 몰입했던 당사자들이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었다.

그로부터 1400여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는 대통령이 나서 동맹관계를 폄훼하고 군기강을 해치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은 “젊은이들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 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며 복무기간 단축 의지를 드러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군 원로들을 향해서는 “지난 20년간 엄청난 국방비를 써 왔는데 군인들이 다 떡 사먹었느냐”고 비난했다. 한미동맹을 지켜온 군 원로를 향해서는 “미국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고 한다”며 사대주의자로 묘사했다.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은 ‘통합신당파’와 ‘당 사수파’로 갈려 날이 새도록 정쟁에 몰두한 채,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강행해도 안보는 걱정없다고 큰 소리 친다. 오히려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국민을 불안한게 한다면서 북핵은 체제수호용이라는 해석을 곁들인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햇볕정책이 우리에게 ’평화를 안겨줬다’며 그 근거로 북한 인민들을 몰아내고 남한 관광객이 차지한 금강산 관광과 노동자 임금 중 상당 부분이 당국으로 들어가는 개성공단을 꼽고 있다.

오죽하면 중국 인민일보가 ‘북한 핵실험’이라는 큰 일이 일어났지만 한국인들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려 있다고 평가했을까. 이 불감증은 전적으로 평화분위기에 젖어 국민을 호도하는 집권세력의 책임이다.

혹시라도 햇볕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거짓 평화로 국제 정세를 호도하게 된다면 그 고통은 온전히 국민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민이 조정을 바로 잡는 길 밖에 없다. 남은 1년 국민이 정신을 똑 바로 차려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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