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동혁 병장 아버지 박남준(55) 씨 |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기습포격으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조타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25분간 교전이 이뤄졌고, 우리 측은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했다.
이제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월의 약이라지만 당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아직도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세상은 그들을 잊었지만 부모들은 6월이 되면 가슴이 미어진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병장은 교전이 시작되자 부상당한 동료들을 응급처치하기 위해 고속정을 사력을 다해 뛰어다녔다. 부상당한 동료를 지혈하는 와중에 북한 함정이 발사한 포탄의 파편이 그의 다리를 관통했다. 그 자리에서 한 쪽 다리가 절단됐다.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 악화로 결국 9월 20일 새벽 전사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몸속에서는 쇳조각 3kg이 나왔다.
장마가 시작되던 23일, 故 박동혁 병장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강원도 홍천을 찾았다. 홍천역에서 택시로 10여 분이 지났을까. 도로 옆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한 노신사 한 분을 발견했다. 동혁 씨의 아버지 박남준(55) 씨였다.
집으로 향하던 중 컨테이너와 비닐하우스를 가리켜 “저게 내가 동혁이 보내고 지난해까지 살았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박 씨는 2002년 아들을 보내고 부인(이경진. 55)과 단 둘이 이곳에 왔다.
그곳에서 소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내외가 살던 컨테이너와 비닐하우스는 지금 암소 6마리 축사로 사용하고 있다. 며칠 전 새끼를 팔았더니 매일같이 울고 있단다. 어미 소의 울음 소리가 자식을 멀리 떠나 보낸 동혁 씨 부모님과 다르지 않겠다 싶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박 씨는 동혁 씨 방문을 열어 보였다. 아들이 퇴원하면 요양을 위해 함께 지내려고 홍천에 땅을 구입했다.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집을 짓고 방을 꾸몄다. 이 곳에는 동혁 씨의 어린 시절 사진, 2009년 제작된 흉상 제막식 사진, 추모비, 위문편지, 추모앨범, 윤영하함 사진들로만 채워져 있다. 지난해 8월 박 병장의 이름을 딴 ‘박동혁함’이 진수식이 있었다. 그 사진은 진열장에 놓여져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자 “텃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면서 소 밥 주고, 소하고 얘기하고, 사실상 정신치료는 소들한테 받았다. 그렇게 미치도록 살았다. 그렇게 안 살았다면 아마 이사람(부인)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 씨는 “가족 자체가 파산되는 것이다. 유족 중에는 며느리, 손녀를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가족들 대부분이 울화병인데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안 된다”고 말했다. 동혁 씨 어머니가 수면제를 끊은 지도 1년이 채 안됐다고 한다.
언제 아들 기억이 가장 절실하냐는 질문이 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주워담을 새도 없이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에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 애들 아빠가 아들 낳고 4년동안 해외에 나가 있어서 동혁이를 혼자서 힘들게 키웠다”고 말했다.
그런 아들을 국군수도병원에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당시를 떠올려서는 “왼쪽 다리는 절단됐고, 엉덩이 살이 없어 변기에도 앉지 못했다. 척추에 뿐만 아니라 배 속에도 100여 개의 파편이 있었다. 사실 동혁이는 의족도 낄 수도 없었고, 대장은 15cm 이상 잘렸다. 배 부위는 3도 화상을 입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상처에 드레싱을 하는데 파편 때문에 너무 아파했다. 의사도 이런 상처는 처음본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에게 지난해 있었던 천안함 폭침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 이 씨는 “천안함을 탄 지 불과 보름 만에 그런 일을 당한 가족도 있다. 입대한 지 50일 밖에 안 되는 이병이었다”면서 “그러니 그 부모들이 어떻게 제정신이고 온전히 살고 있겠는가. 내가 유족 대표를 만난 적이 있는데, 부모들이 미처버릴 것 같다고 하더라.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스물한 살 때까지 대학교 다니다가 자원해서 입대해서 배 탄지 보름 만에 그렇게 되면 어느 부모가 제정신이겠는가”라고 말했다.
박 씨는 마지막으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이 열리니 국민들 마음 속에는 이미 통일이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금강산 박왕자 피살 사건이 아니었으면 우리 국민들은 경각심을 잃어버리고 살았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김대중 정부 때 북한 미녀 응원단이 오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국민들이 남북 분단이 대치상황인데도 정신이 너무 헤이해진 것 같다”며 “국민들 하나 하나가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라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시간이 넘게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아버지 박 씨는 집에 기자들이 많이 왔는데 그냥 보낸 적이 없다며 점심을 꼭 먹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는데 박 씨는 반주(飯酒)를 곁들였다. 동혁 씨를 그렇게 보내놓고 반주를 해야 식사를 한다는 박 병장의 추모카페(http://cafe.daum.net/pkm357) 본부장의 얘기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故박동혁 병장 방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조종익 기자 |
– 제2연평해전이 올해로 9주년을 맞이했다. 어떻게 지냈나.
동혁이 그렇게 보내놓고, 같이 다녔던 해수욕장, 낚시터, 동혁와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보내니 미쳐만 가는 것 같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어 이듬해(2003년) 3월 31일 콘테이너 하나 가지고 이곳(강원도 홍천)으로 왔다. 처음에 왔을 때 물, 전기도 없어서 이웃집에서 빌려서 썼다. 매일 둘이서 50일 정도 산에 가서 나무만 하니까 (몸무게가) 15kg씩 빠지더라.
또 남는 공간에 텃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면서 소 밥 주고, 소하고 얘기하고, 사실상 정신치료는 소들한테 받았다. 그렇게 미치도록 살았다. 그렇게 안 살았다면 아마 이사람(부인)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다른 유가족들과는 자주 만남을 갖나. 근황은 어떤가.
유가족들은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있어 유가족끼리 만나면 얘기를 해도 다른 사람들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6월에는 추모행사가 많아 자주 보면서 지내고 있다. 경비는 가족들이 월 5만원씩 모아서 식사나 숙박비로 사용한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방도 2개만 잡고, 각자 반찬 한 가지씩 가져와서 해먹기도 한다.
우리까지 3가족이 농사를 짓고, 나머지 3가족은 70이 넘은 연로하신 분들이다. 한 유가족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는데, 아들을 잃고 나서 배도 팔았다.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는 독자다. 아들 하나 잃음으로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자체가 파산되는 것이다. 며느리, 손녀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니 술을 마실 수밖에 없고 지금은 간경화 말기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유가족들 대부분이 울화병인데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안 된다. 동혁이 엄마도 여기와서 수면제 먹으면서 보냈다. 이제 겨우 약을 끊은지 1년이 되어가고 있다. 모든 유가족이 그렇게 지내고 있다.
– 지난 정부(DJ-노무현)에서 유가족들에 대한 처우는 어땠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많은 괄시를 받으며 보냈다. 제2연평해전은 북한군 30명을 사살한 엄연히 승전인데도 김대중 정부가 패전이라고 해 훈장도 한 등급 강등당했다. 자식잃은 부모가 되려 죄인행세를 했다. 청와대에서 한 번씩 부른 적이 있다. 청와대에 가면 짜여진 틀에 누구는 마이크 잡고 말하고 식사만 하고 나오는 다분히 형식적인 자리였다.
지난 정부는 우리가 간첩도 아니고 왜 미행을 하고 도청을 했는지 모르겠다. (박 병장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말을 하면서 격한 울분을 토했다.) 수사기관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어디 갔다왔냐고 묻더라. 우리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이 다 그랬다. 우리집에 전화가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한번은 아들 학교에서 추모행사를 했는데 한 3일을 전화하더라. 그 뒤로는 누가 이쪽으로 오라고했냐, 뭘 먹고 사냐, 누가 여길 개간하라고 했냐고 계속 물어서 내가 욕을 하면서 사생활 침해로 고발한다고 했더니, 그 뒤에 어떤 한 간부가 찾아와서 싹싹 빌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부 때문에 말도 못하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생활했다.
– 현 정부 들어서는 좀 달라진 게 있나.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 된 박 병장의 묘역. 사진제공=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본부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그래도 이 정부 들어와서 2008년 4월 ‘제2연평해전’으로 승전으로 격상되었고 정부 차원의 기념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하면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도 천안함 용사들과 같은 예우를 해주라고 지시를 했다.
그 뒤 청와대 비서관을 통해 가족들이 원하는 사항을 전달했다. 첫째, 대전현충원 묘비의 문구가 잘못 된 것을 수정해달라. 둘째는 6인의 묘비가 4군데로 흩어져 있어 참배객들이 찾기 힘드니 한 곳으로 모아달라. 셋째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지라는 이정표를 달아달라고 했다. 묘비 문구와 이정표는 최근에 개선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천안함 용사에 준하는 국가보상을 해주라고 지시를 했는데도 국방부에서 커트해서 못해준다고 통보를 받았다. 이 정부 들어와서도 별로 되는 것은 없다.
– 국방부는 왜 그런 것인가.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당시 ‘공무상 사망자’로 처리됐다. 2004년에 우리 애들로 인해 군인연금법이 개정되면서 ‘전투에 의한 전사’와 ‘일반 공무에 의한 사망’으로 나뉘면서 보상금액도 바뀌었다. 그 뒤로 아프가니스탄 파병 장병이 전사했을 때도 이 법을 적용받았다. 우리 애들로 인해 법이 개정된 것이니까 적용이 맞지만, 국방부에서 소급이 맞다고 하길래 그러면 소급시켜 달라고 했는대 또 안 된다고 했다. 6.25전쟁 이후 월남전 등에서 숨진 장병들이 400여 명이 되는데 형평성 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박진 의원이 후원회장인데 상임위에 올려 특별법 제정을 추진해 정부에 건의해 정부가 마지못해 움직였는데, 그 마저도 안 되었다. 대통령이 지시한 것을 국방부가 못해주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통령은 거짓말쟁이다.
– 한상국 중사 부인이 이런 나라에서 못 살겠다며 미국에 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유가족들은) 그 사람이 왜 갔는지 다 알고 있다. 오죽 했으면 갔겠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도 힘든데, 그렇게 하면(정부의 미행, 도청, 감시 등)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영웅으로 떠받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가족들을 미행하고 도청하고, 대통령부터 밑에 있는 사람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버림받는 부모라고 했다. 훈장도 한 단계 격하당하고 미행, 도청당하고 국무총리는 한 번도 행사에 안 왔다. 대한민국이 자유국가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런대 어떻게 견디며 살겠나. 정말 그거는 안 당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생각하는 척 하면서 스트레스 주는 것도 말도 못한다. 모든 가족들이 다 겪었을 것이다.
– 박 병장이 언제 가장 생각나는가. 어떤 아들이었나.
(박 병장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담담하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감정을 추스리지 못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이내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잠들기 전에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 애들 아빠가 아들 낳고 4년동안 해외에 나가 있어서 동혁이를 혼자서 힘들게 키웠다. 낳자마자 20일 지난 후 황달에 걸렸고, 잔병치레도 많이 해 더 안쓰럽고 마음이 더 가게 된다. 그렇게 키워서 그런지 더 애뜻하고 신경을 더 쓰게 된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추스려졌다.
동혁이는 건전한 사고를 가졌다. 원광보건대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야겠다고 해 원하는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겨울 방학 때 안산 집에 올라와 매일 공원 5km를 달리고 들어오더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훈련소에 들어가서 자기 때문에 중대가 달리기를 꼴등하면 벌을 받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더라. 그렇게 준비를 했다. 그렇게 군대를 보내고 오면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부자간에 신뢰가 있었고, 믿음직스러웠다. 형제간의 우애심도 깊었고, 내가 잠깐 집에서 쉬는 날이면 옆에 와서 애교를 부리며 뒹굴고 그랬던 애다. 병원에 있을 때 엄마한테 ‘엄마 나 빵사다 먹고 아빠하고 옛날처럼 그렇게 뒹굴고 할 수 있냐”고 묻더라.
– 국군수도병원에 84일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 핏 물에 시궁창, 탄약 냄새, 손, 발, 코 온 몸이 시커멓더라. 내 옆으로 병상이 하나 지나가는데 우리 아들이 아닌 줄 알았다. 왼쪽 다리에 총알을 맞아 왼쪽 다리는 절단됐고, 엉덩이 살이 없어 변기에도 앉지 못했다. 척추에뿐만 아니라 배 속에도 100여 개의 파편이 있었다. 사실 동혁이는 의족도 낄 수도 없었고, 대장은 15cm 이상 잘라서 대장도 없고, 배 부위는 3도 화상을 입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상처에 드레싱을 하는데 파편 때문에 너무 아파했다. 의사도 이런 상처는 처음본다고 하더라.
그래도 죽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뇌가 멈추고 온 몸이 축 늘어지더라. 그래서 안되겠다싶어 수도병원 원장실에 올라가 여기에 두면 죽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내주면 큰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원장이 처음에는 그렇게 하라고 하더니 중환자실에 갔다오더니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든 살리라고 했다면서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환장하는 줄 알았다.
– 박 병장이 처음 깨어났을 때 어땠나.
한달 쯤 지나서 깨어났는데 동혁이가 ‘여기가 어디냐고 묻길래’ 병원이라고 하니까 병원비를 걱정하더라. 그리고 또 한번은 ‘엄마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어’하면서 계속 울더라. 그러더니 없는 왼쪽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더라. 주물러 줄 다리가 있어야 주물러 주지 않겠나. 왼쪽 대퇴부는 감각이 없고, 척추에 파편이 있으니까 계속 아프니 주물러 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며칠을 울더라.
여기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냐고 물었더니 357함에서 밥 해주시는 아주머니 오빠 배에 실린 기억이 난다고 그러더라. 왼쪽 대퇴부에 총알을 맞고, 오른팔에 총알이 박히고, 배 속에는 파편이 100개 있고, 연기를 들여마시면서도 기억을 한다는 것이 정신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몇 번은 환청이 들리는 듯한 행동을 보인 적도 있었다.
– 지난해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이 발생했을 때 남달랐을 것 같다.
당연하다. 우리는 천안함 폭침이 일어났을 때 10시에 알았다. 우리가 지금 있는 집을 짓고 그 다음날 유가족들과 집들이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작은 애가 ‘엄마 천안함이 가라앉고 있대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알았다. 천안함을 탄지 불과 보름 만에 그런 일을 당한 가족도 있다. 입대한 지 50일 밖에 안 되는 이병이었다.
그러니 그 부모들이 어떻게 제정신이고 온전히 살고 있겠는가. 내가 유족대표를 만난 적이 있는데, 부모들이 미처버릴 것 같다고 하더라.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21살 때까지 대학교 다니다가 자원해서 입대해서 배 탄지 보름 만에 그렇게 되면 어느 부모가 제정신이겠는가.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2연평해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우리나라가 그 동안 초등학교 교육를 통해서 (남북이 처한) 현실을 잘 가르쳐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교과서에서 빠졌다. 남과북이 대립하고 휴전상태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이 열리니 국민들 마음 속에는 이미 통일이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금강산 박왕자 피살 사건이 아니었으면 우리 국민들은 경각심을 잃어버리고 살았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한주호 준위님 같은 분이 교과서에 실렸다. 그렇게해서라도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현실을 알려야 한다. 김대중 정부 때 북한의 미녀 응원단이 오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국민들이 남북 분단이 대치상황인데도 정신이 너무 헤이해진 것 같다. 국민들 하나 하나가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라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박 병장의 돌 사진과 대학교 입학 사진./조종익 기자 |
▲박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와 어머니 이경진 씨./조종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