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런 불륜이?”…”너는 왜 못하냐?” 면박

2000년대 이르러 북한 여성들 중에는 출신성분이나 가정형편의 제약을 뛰어 넘어 장사나 외화벌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성공녀’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런 성공녀들은 90년 대 이전까지 부모의 배경(출신성분)이나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삼았던 북한의 상류층 여성들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혼전에는 부모의 출신성분, 결혼 후에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평가되는 북한에서 가난하고 별볼 일 없는 집안 출신의 여성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1990년대 식량난은 북한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국가 배급의 실종과 함께 무능해진 남편의 존재와 배고픔에 허덕이는 자식들을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북한 여성들의 ‘배짱’이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장마당 길거리 장사에서부터 남성들도 함부로 손 대기 어렵다는 외화벌이 분야까지 여성들의 진출이 늘어났다.


통상 외화벌이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경우 당,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와 같은 권력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남성의 아내나 자녀들이 우선 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성공녀’들의 경우 힘 있고 간부들과 이성적으로 친해져 외화벌이 기관에서 일자리를 갖게 된다. 


시장 장사에서도 이런 일은 흔해졌다. 최근에는 별 밑천이 없어도 대규모 도매장사를 하는 남성들이나, 외화장사 상인들의 뒤를 봐주는 ‘큰손’ 남성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성공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 여성들은 가정은 가정대로 유지할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부족한 남편’을 남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남편’으로 상승시킨다. ‘성공녀’를 아내로 둔 덕에 입당(入黨)과 사회적 성공을 손에 쥐는 남자들도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도 이런 여성들에 대해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면서 ‘바람둥이’나 ‘불륜녀’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도 점차 이 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되어 버렸다.


번쩍거리는 승합차에 올라 앉아 향수내 물씬 풍기며 남성들과 어울려 다니는 ‘성공녀’를 두고 뒷담화를 벌리는 사람에게는 “너는 왜 그렇게 못하냐”고 면박을 주는 사람들이 늘었다. “굶어죽게 생긴 판에 정조는 무슨 말라죽을 놈의 정조냐” “그것도 타고난 재간” 이라는 평가가 이어지는 것이다.


‘성공녀’들에 대한 평가는 지역별로 서로 다른 특징을 갖는다.


북한 사람들은 중국 단동과 마주한 평안북도 신의주의 ‘성공녀’들에 대해서는 “너무 화려하고 천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중앙급 외화벌이 기관을 비롯한 모든 외화벌이 단위들이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신의주에 집결됐다. 신의주 여성들 중에는 이 때 기회를 이용해 외화벌이 회사에 들어가거나 이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일약 ‘성공녀’의 대열에 들어선 경우가 많았다.


2001년 당시 신의주시 해방동에 살고 있던 독신여성 김 씨(33)는 당시 잘 나간다고 이름 날리던 외화벌이 사장(유부남)과 2년간 동거생활 끝에 개인주택을 ‘선물’ 받았다. 또 그녀의 두 남동생도 모두 외화벌이에 취직해 신의주에서 ‘상층생활’을 누리게 됐다.


또 신의주 동중동에 사는 유부녀인 신씨(43)도 유부남인 외화벌이 사장인 김 씨와 불륜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식량이나 사탕가루, 밀가루 등을 넘겨받아 돈벌이를 해 ‘성공녀’가 되었다.


날마다 신씨와 김씨 두 사람이 같이 다니며 ‘꼴볼견’을 연출하고 있다는 동네 소문을 듣고 김씨 아내가 신씨에게 찾아갔다. “너도 가정이 있는 여자가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라며 질책하자 신씨는 오히려 “너는 그 나이 되도록 이만한 세상이치도 모르고 사는가?”라고 반박했다. 결국 김씨 부부는 이혼하게 된다.


당시 신의주에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매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는데, 과거에는 불륜이라고 지탄받을 행동들을 “똑똑하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들이 북한에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자 신의주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나빠졌다. 지금도 일부사람들은 신의주 사람들을 “노골적이고 천하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반대로 평양 여성들은 알 듯 말 듯 조용히 이런 일을 처리해 “고상하고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여름 함경북도 경성에서 살던 A양은 평양에서 살고 있는 언니의 집에 거처하는 중  언니와 형부의 생활을 보고 크게 놀랐다. 겉으로 화기애애하고 무척 다정해 보이는 이들 부부는 저마다 밖에 ‘애인’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공업 부문 외화벌이 기관에서 근무했던 형부의 애인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여성이 애인이었고, 언니는 중앙당에 근무하는 유부남과 애인사이였다. 언니의 애인은 사업상 용무로 북한 전역뿐 아니라 해외출장도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자기 아내의 선물과 함께 애인의 선물도 잊지 않고 챙겨주었으며 식량을 비롯한 필수품들을 보장해주는 ‘보물창고’역할을 맡고 있었다.


또 애인에게 큰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소개해주고 북한 당국의 검열이나 통제 때문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뒷처리 해주면서 ‘성공녀’가 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A양의 언니는 평양 본터내기 여성들 못지 않게 평양에서 ‘큰 손’장사를 펼치며 ‘성공녀’의 생활을 누리게 됐다.


당시만 해도 옛날 ‘봉건적인 생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A양은 언니의 말을 통해 평양내 적지 않은 부부들이 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평양 사람들의 경우 신의주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정은 가정대로 유지하면서 물흐르듯이 조용히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고상하고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와 같은 생활방식들은 상층과 하층을 막론하고 북한 전역에 새로운 생활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성공녀’의 등장은 양면성을 갖는다. 일부 이혼이나 부부간 불화로 불행해진 가정이 있는 반면 남성 위주의 권위적인 봉건문화를 정면에서 비웃고 이를 조롱하는 효과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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