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지는 ‘러시아 민족주의’, 뿌리를 아시나요?

1990년대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에서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과격해지고 있다.

최근 황인종이나 흑인 그리고 지중해와 카프카스 산맥지역 출신 백인이면 러시아 도시의 거리를 다니기도 위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한국에도 알려져 있다.

민족,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Sova인권단체’의 자료에 의하면 지난 2007년에 러시아에서만 극한 민족주의, 인종주의 깡패들의 공격 사건이 632건에 달했고 67명이 사망했다. 2006년에 비해 12% 증가했다.

그러나 이 통계는 문제의 중요성을 잘 표현해내지 못한다. 요즘 러시아에서도 인터넷 블로그 문화가 활발해져서 필자도 러시아 온라인 토론을 많이 읽어 본다.

눈에 띄는 것은 극한 민족주의, 극우 인종주의 의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네티즌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인기 블로그를 보면 극한 민족주의, 인종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블로그가 거의 절반 정도인 것으로 나타난다.

민족주의 운동 안에서도 심각한 갈등과 의견 차이가 없지 않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러시아에서 북유럽계 백인들이 아닌 ‘유색인’들을 모두 러시아에서 추방시키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을 법률화함으로써 ‘백인들을 위한 러시아’를 만드는 것이다.

탈소련 러시아에서 민족주의의 폭발적인 증가를 이상한 현상으로 생각할 근거가 있다. 주지한 바와 같이 러시아는 국제주의 그리고 인종의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선언한 소련의 후계국가이자 다민족 국가이다. 그런데 왜 러시아에서 소련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빨리 성장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러시아와 소련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쉬킨 조상은 흑인 노예…러시아에서 출세

러시아는 단일민족 국가였던 시대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국토가 비교적 작은 나라였지만 북방 지대에 핀란드 부족들이 살았고, 남방 지방에는 이란과 터키 부족들이 살았다. 15세기 이후 국토를 확대하기 시작한 러시아 대공국은 이웃 지역을 정복했고 시베리아나 연해주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넓은 식민지를 지배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러시아 사람 대부분은 러시아 제국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 제국주의와 성격이 다를 줄 알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서양 제국주의와 달리 러시아는 비 슬라브계 지역을 착취하기보다 발전시켰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소련 시대 선전에 의해 형성된 그런 의견은 정치적 신화에 불과하다.

물론 러시아 식민지는 다른 서양국가의 식민지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없진 않았다. 러시아 지배층은 소수민족 출신들을 별 문제 없이 포용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면 1700년대 초 러시아에서 대규모 운하 공사를 시작한 기술자는 몽고사람이었다. 1812년에 나폴레옹과 싸우다 죽은 러시아 군대 최고 장군의 3명 중 1 명은 카프카스 산맥지역 귀족이었고 또 한 명은 스위스 귀족, 또 1명은 슬라브계 러시아 사람이었다.

또,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푸쉬킨 시인의 조상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였지만 러시아로 팔려와 좋은 재능 덕분에 군사 기술자가 되었고 나중에 군대 대장, 공병사령관까지 되었다. 18세기의 영국을 생각해 보면 영국 해군사령관이 된 인도 출신 귀족이나 흑인 공병사령관은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 러시아 민족주의자 대부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제정 러시아나 소련은 소수민족을 식민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낙후한 지역”에 “계몽과 진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근대화 위해 중앙아시아에 ‘민족국가’ 새로 만들어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은 증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7세기 러시아 사람들이 정복한 시베리아에서 원주민 인구는 100여 년 동안 수배로 감소했다. 이러한 감소는 스페인이 정복한 남미에서 발생한 재앙과 별 차이가 없지만 러시아 사람 대부분은 이 사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인구 감소의 이유는 고의적인 학살보다 러시아인들이 투입한 새로운 전염병의 확산이었다.

러시아 식민지의 본질도 영국이나 스페인 식민지와 별 차이가 없었다. 기본 목적은 식민지의 자연자원을 이용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서로 경쟁하는 국제사회에서 조금 더 높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1917년 이전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좌익 세력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비판했다. 그들이 건설하려고 했던 공산 유토피아에서는 민족 차별과 같은 것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민족주의 세계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등장하여 1900년을 전후하여 러시아 제국에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17년 혁명에 의해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자 러시아 소수민족들은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상이 미약하고 경제적, 군사적이 기반이 없어서 독립 건국은 불가능했다.

결국 공산주의 세력이냐, 반공세력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은 소수민족 사회는 공산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영토 유지를 필수 조건으로 여긴 반공세력과 달리 공산당은 민족자결을 인정하기도 했고 모든 소수민족들에게 폭 넓은 자치권을 약속했다. 사실 이러한 소수민족 정책은 공산당의 승리를 초래한 요인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1920년대 초에도 공산당 정부가 약속했던 민족자결 원칙을 실현할 의지는 없었지만 민족평등과 무차별에 대한 약속은 결코 선전이 아니었다. 1922년에 창건된 소련은 가맹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인데, 공화국마다 공산당의 실제 통제에 불구하고 상징적인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소련은 형식적으로 민족국가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가맹공화국 숫자가 1922년에 4개에 불과했지만 몇 차례 행정개혁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는 15개가 되었다. 가맹공화국은 자기 정부, 자기 공산당 그리고 외무부까지 있었다. 국가 서류는 의무적으로 러시아 말과 함께 가맹공화국의 “국어”로 발간해야 했다.

1920년대 당시 공산당 고급 간부들의 경력을 보면 제정러시아에서 심한 차별을 당했던 유태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출신이 적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 소련 정부는 소수민족들에게 중요한 특권을 주었다. 소수민족 출신이면 대학 입학이나 사회 진출에서 슬라브계 출신보다 더 쉽도록 했다. 정부는 민족어 개발, 문자 창조, 학교 설립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재미있는 사례는 중앙아시아였다. 공산주의 혁명까지 전근대 사회로 남아있던 이 지역에 터키어 부족이나 이란계에 속한 수많은 방언을 사용하는 수십개 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의 정체성이 왕이나 종교에 따라 결정되었다.

소련방의 근대화를 위해 현대식 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공산당 정부는 중앙아시아에서 역사적인 전례가 거의 없는 국경을 새로 만들어서 인공적으로 결정된 지역 안에서 의식적으로 ‘민족 만들기’를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5개 가맹공화국을 만들어 각 공화국마다 어떤 방언을 “문화어”(표준말)로 결정하여 학교, 신문, 방송을 통해 확산시켰다.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의 5개 독립국가는 모두 소련의 민족정책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이 지역에 살던 수 십개의 부족들을 좀 다르게 나누었더라면 현재 이들 지역의 정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1960년대 ‘정치 자유화’로 민족운동 성장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정책은 바뀌기 시작했다. 실권을 잡고 있던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러시아 말을 완벽하게 할 줄 모르는 카프카스 소수민족(그루지아) 출신이었지만, 그는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세계 혁명’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스탈린의 목적은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전세계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초강대국 건설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련의 핵심 민족인 슬라브 민족들, 특히 러시아 민족의 민족주의를 촉진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대학 입학 등에서 소수민족의 특혜는 소련 붕괴까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지만, 1930년 중반부터 소련의 정치는 점차 러시아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소련 정치계와 군사 엘리트 중 소수민족 출신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또 극단적인 경우 어느 소수민족들에게는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딱지를 붙여 심한 차별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집단 차별의 대상이 된 민족이 바로 1937년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이었다.

고려 사람들처럼 1937~53년 강제 이주, 차별을 당한 소수민족은 10여 개 정도였다. 이들 민족은 북한처럼 통행증 없이는 거주 지역에서 바깥으로 못 나갔다. 대부분 대학 입학도 불가능했고 대도시로의 이사도 불가능했다. 또 부모의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농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이러한 차별이 많이 완화됐지만 소련 붕괴까지 주요 국가기관에 취업을 못하는 소수민족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고려사람이나 유태인이라면 외무부, KGB 특무경찰 등에 들어가긴 거의 불가능했다. 소련 군대에서도 이러한 “의심스러운” 소수민족들은 대령 이상 진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의 규모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1930년대 말 이후 소련의 민족정책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 정책은 슬라브계의 지배적인 지위를 인정했다. 동시에 이 정책은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후원했고 보호하였다.

이러한 모순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공산당의 국제주의적 유산 그리고 공산당 창시자인 레닌의 교훈을 노골적으로 위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비슬라브계 민족의 비율이 40%에 달하는 국가를 다스리려면 이들 소수민족을 포용하는 것이 필수 과제였기 때문이다.

유태인이나 독일인처럼 “자기 국가”가 있는 민족, 또는 스탈린시대에 반공민족으로 집단 차별을 당한 소수민족은 문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소수민족 출신들은 출세도, 생활도 러시아인과 거의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소련 최고기관의 구성을 분석해보면 소수민족들은 192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소련 내부에서의 선전도 러시아 식민지에 대한 비판이 좀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위대한 러시아 민족”의 지도적인 역할을 찬양했고 러시아 민족은 소수민족들을 교육시키려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이나 러시아 정부의 통제 정치는 역사 교과서뿐 아니라 역사 연구에서도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이러한 선전은 거꾸로 된 결과를 초래하였다.

러시아 민족은 자원이 소수민족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니까 우리가 잘 실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소수민족들을 ‘기생적인 사람들’로 보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소수민족들은 그러한 선전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무시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전을 믿지 않고 모스크바의 정책을 소수민족에 대한 착취로 보게 되었다. 결국 소련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 모든 가맹공화국은 다른 공화국이 없으면 더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스탈린 시기 소련에서는 엄격한 통제 때문에 민족운동은 있을 수 없었지만 1960년대 초부터 정치 자유화로 인해 민족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소련 체제에 도전하고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이 운동은 대부분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 또 공화국의 자치권 확대나 문화유산 보호를 요구하는 단체들은 합법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하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