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천 창광거리’는 왜 입주 5년만에 ‘귀신 아파트’로 변했나?








지금 북한에서는 10년 전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대기근)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민심이 뒤숭숭하다. 그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꽃제비(유랑자, 노숙자)가 늘어나면 북한사회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기자는 함경남도 단천시에 사는 조카집에 가끔 들렀다. 조카가 사는 곳은 신단천 1동에 있는 아파트였다. 91년에 완공된 아파트였지만 4, 5년 사이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됐을까?

신단천 1동은 처음에 단천시 용강리였다.

이 용강리에 아파트가 건설된 것은 1983년 여름이었다. ‘단천 마그네샤크링커공장’을 찾은 김일성의 지시로 아파트가를 짓게 됐다. 김일성은 이 공장 노동자들과 당시 건설중이던 ‘단천제련소’ 노동자들을 위한 아파트를 용강리의 바다가 가까운 곳에 건설하도록 지시하고, 설계는 평양에 건설한 창광거리 아파트와 똑같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전국 각 도와 시, 군에서 아파트 건설 돌격대가 조직되어 그해 가을부터 건설이 시작됐다.

8년만에 2천5백세대 아파트 완공

그때 이미 북한경제는 내리막길이었다. 자재와 설비가 공급되지 않아 아파트 건설이 자주 중단되었다. 모래와 자갈 등 일부 자재는 바로 근처에서 채취하기로 했다. 철도가 가까워 건설 조건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멘트와 목재, 철근이 제때에 오지 않아 수천명의 건설일군들이 그냥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2천5백세대를 짓는 데 8년이 걸려 겨우 완공했다.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 수는 4천5백명이 넘었다. 아파트는 5층부터 15층까지 다양한 층수와 여러 모양으로 건설되었다.

그런데 아파트가 완공됐으나 입주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래바람만 불어대는 허허벌판에 아파트만 덩그렁게 짓고 사회 편의시설도 없고, 장마당도 없었다.

또 공장까지 거리가 8km나 되지만 출퇴근 버스가 한 대도 없었다. 아파트를 그냥 비울 수 없었던 함남도당은 제련소와 마그네샤크링커공장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입주시키라고 지시했다. 하는 수 없이 힘없는 노동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입주했다.

100와트 전구와 궤짝 속 아기

새로 지은 아파트 지구를 신단천동으로 하고 1동과 2동으로 나누었다. 입주 첫 해에는 수돗물 공급과 난방이 되었지만 다음 해부터는 전혀 난방이 들어오지 않았다. 함경남도의 영하 10도가 넘는 겨울 추위에 건강한 어른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니 노인과 어린이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일반가정에서 전기를 조명용과 TV시청용으로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전기 검열원들이 주야로 단속한다. 여기에 걸린 가정은 전기를 끊거나 기업소, 인민반을 통해 제재를 가한다.

제련소에 다니는 어느 노동자 부부가 생후 10개월 된 아기를 궤짝에 넣고 그 안에 100와트 짜리 전구를 켜 궤짝 안을 따뜻하게 덥였다. 이것이 단속에 걸렸다. 그 광경을 본 검열원들도 차마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가버렸다.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5층 이상에는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 집집마다 장독을 몇 개씩 준비해 물을 가득 담아 수돗물이 끊기면 장독물을 사용했다. 그것도 떨어지면 온 집안이 물통으로 물을 날랐다. 아파트 층수를 낮게 지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식량난이 본격화되고 굶어죽는 사람이 대폭 늘어난 1994년부터 단천제련소와 마그네샤크링커공장도 식량을 주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천시에서 아사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신단천아파트 지구였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집을 버리고 꽃제비가 되거나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이나 농촌으로 내려갔다.

버리고 간 아파트는 뜯어갈 수 있는 것은 다 뜯어가고 완전히 페허가 되었다. 1층에만 사람이 살고 2층부터는 거의 비어 있었다.

비어있는 아파트에는 점점 쓰레기와 오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빈 아파트에서 살인사건도 자주 일어나자 신단천 사람들은 ‘귀신 아파트’로 불렀다. 이 귀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사할 경제력도 없었다.

김일성이 바다가 보이는 곳에 좋은 아파트를 지어라는 말 한마디에 주변조건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파트만 덜렁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오로지 수령님의 말 한마디가 가장 중요한 북한사회의 속모습을 ‘귀신 아파트’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지금쯤 나의 조카도 ‘귀신 아파트’를 떠났는지 궁금하다.


강재혁 기자(함흥출신, 2004년 입국) kjh@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