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처럼 사라진 北 ‘신의주특별행정구’ 추진

2002년 북한은 한 도시를 자유지역으로 변화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도시 주민들이 제한 없이 외국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고, 도시 안에 검열이나 김 씨 일족(一族)에 대한 개인 숭배도 없고, 도시의 질서를 자본주의메 맞게 꾸리겠다고 했다. 일단 공상이 아닌 듯 보였다. 2002년에 북한 당국은 평안북도 신의주의 북부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특별행정구로 변화시킬 계획이 있었다. 북한 당국은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초대 장관으로 화교 실업가 양빈(楊斌) 어우야 그룹 회장을 지명했다. 하지만 막판에 양빈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중국에 체포되면서 이 계획은 무위에 그쳤다.


이와 관련 2008년 홍콩에서는 ‘불을 주는 자(盜火者, 한국어 번역 ‘김정일과 양빈’)’이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는 신의주특별행정구 프로젝트를 프로메테우스와 비교하면서 이런 난망(難望)적인 이름을 지었다. 양빈은 1963년 2월 11일 중국 난징(南京)에서 태어났고, 5살 때 고아가 돼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중국 해군 대포 사관학교 졸업한 양빈은 군 복무 후 1989년에 네덜란드로 이민갔고, 나중에 귀화하면서 실업가가 되었다. 양빈은 부동산업도 했지만, 주요 관심은 사실 온실(溫室)사업이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 제일 부유한 화교(華僑) 중 하나가 되었다.


2001년에 김정일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방문했을 때 중국 측은 특히 푸둥(浦東)이라는 상하이 사업 지역을 김정일에게 보여 주도록 노력하였다. 현재 북한 전문가들 중에 김정일의 이 여행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체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장쩌민(江澤民)과 만난 김정일은 “개혁-개방 정책 실행 때부터 중국은, 특히 상하이는 엄청나게 진전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이 올바른 것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고 하였다. 푸둥의 마천루 이외에 김정일이 인상 깊게 생각했던 것은 상하이 온실이었다. 그는 온실에서 겨울에도 농업 하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북한에서 온실을 세우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온실에 대해 알아본 김정일은 그 때 처음 양빈에 대해 알게 되고, 양빈과 관계를 맺을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개혁의 성공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외국자본의 투자인 것을 깨달았고, 북한에 귀국하자마자 투자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하였다. 후보자 중에 하나는 바로 양빈이었다. 양빈은 협력 프로젝트를 승인받아 2001년부터 그의 회사는 평양에서 온실을 세웠다. 양빈과의 회담을 한 사람은 김동규 당중앙위원회 부장이었다.


그런데 2002년 1월 21일에 김동규는 양빈에게 북한에서 경제특구를 세울 계획이 있다고 했다. 북한이 라진에 경제특구를 세웠지만 실패로 끝났다고 했는데, 공화국 당국이 신의주 북부에 더 하나 경제특구 세울 생각이 있다고 했고, 특구의 넓이는 27km²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양빈에게 이 경제특구가 되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양빈은 금방 답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김동규는 고민해보라고 했고, 추가로 실패하면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양빈은 일단 고민해보겠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하였다.


양빈은 다음 평양 방문 때 특구 프로젝트를 실행하자고 했는데, 조건이 있다고 했다. 첫째, 조-중우의교(압록강철교)를 포함하면서 특구의 지정 면적을 기존27km²에서 82km²로 넓히자는 것, 둘째, 경제특구 아닌 특별행정구를 세우자고 했다. 양빈은 중국에 홍콩과 마카오과 같은 특별행정구가 있다면서 그곳은 본토와 달리 공식적으로 자본주의 질서가 있어 외국 투자를 많이 받는다고 설명하였다. 신의주도 이런 자본주의 도시로 변경시키면 북한이 외국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신의주 특구와 관련된 기본법도 전세계에 공포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로 신의주 당국은 평양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적이고, 신의주에서 북한 법을 실행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북한 당국은 양빈의 제의가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특별행정구’라는 표현 자체는 식민지주의와 관련된 명칭이었고, 북한 내 어느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자본주의 질서를 선언하는 것도 북한 체제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웅변술이 능한 양빈이 북한 당국 앞에 계속해서 프로젝트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외국인들이 ‘특별행정구’라는 명칭으로 투자를 잘 할 것이다” “신의주는 상하이 푸둥보다 더 번영하겠다”등 표현으로 아름다운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북한 대표는 타협을 제의하였다. 사실상 특별행정구를 설립하고, 이름만 ‘경제특구’ 그대로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양빈은 “외국 사람들은 특별행정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름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양빈은 신의주 당국이 자기 여권 발급 권리도 있고, 신의주에서 북한 국기나 국장과 다른 국기 및 국장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국기와 국장 디자인은 마카오의 국기와 국장에 따라 정의되었다.









▲북한 신의주특별행정구 구기(左)와 구장(右)의 모습.


결국 양빈의 팀은 북한과의 협정을 이끌어냈다. 신의주는 홍콩이나 마카오 같은 특별행정구로 변화될 예정이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신의주특별행정구 기본법’을 채택하였다. (본문 http://ko.wikisource.org/wiki/ 신의주특별행정구-기본법 참조) 기본법의 중요한 규칙 중에 하나는 ‘신의주특별행정구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국장, 국기, 국가, 수도, 영해, 영공, 국가안전에 관한 법규 밖의 다른 법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양빈은 첫 장관으로 임명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임명장을 받았다.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이 이 사실을 보도하고, 노동신문뿐만 아니라 지방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 기본법 실행 예정 날짜는 2002년 9월 30일이었다.


양빈은 기자 회견을 요청했고,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병행정구 설립 동시에 신의주 50만 명 주민 중에 30만 명이 특병행정구 이외로 이주될 것이고, 나머지는 그대로 신의주에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9월 30일부터 신의주에 모든 외국인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가하겠다고 하였다. 조선일보 기자가 “혹시 한국인까지도 무비자 입국 허가할 것인가”라고 묻자, 양빈은 “그렇다”면서 “한국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같은 말을 써서 신의주에서 아주 환영한다”고 했다. 추가로 신의주 입법회에 한국인 1, 2명까지 임명할 기획이 있다고 하였다.
 
신의주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검열, 탄압, 독재, 개인 숭배 등이 갑자기 사라지고, 개인의 자유와 자본주의 경제 도입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9월 30일이 됐지만 신의주에 무비자 입국이 안 되었다. 양빈은 이것이 북한 정부가 한국 국민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반대하고, 신의주와 북한 본토를 분리하는 울타리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1, 2개월 지나면, 한국 국민들에게 대만 사람이 중국 대륙에 방문할 때 받는 ‘대만동포증(臺胞証)’과 같은 증서를 만들면 입국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2002년 10월 4일 양빈은 돌연 탈세 혐의로 중국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신의주 프로젝트와 연결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2003년 양빈은 18년 징역 선고를 받아 지금도 중국 감옥에 복역 중이다. 신의주특별행정구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북한 당국의 개혁 프로젝트 중에 ‘신의주특별행정구’는 가장 극단적이고 용감한 것이었다. 돈 냄새를 느낀 김정일이 수십만 명 신의주 주민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것까지 승낙하였다. 이 스토리의 교훈은 독재 권력보다 더 강한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력은 바로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