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시대 정치범과 北 수용소

▲ 구소련 당시 수용소

북한은 스탈린주의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에서는 1950년대의 개혁으로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된 고전적 스탈린주의 정치문화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뿐이다.

60, 70년대 이후의 북한은 스탈린의 소련보다 스탈린주의적인 성격이 더 강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정치범 통제정책이 원래 소련으로부터 들어온 ‘강제 수입품’이었지만, 이 수입된 씨앗은 북한 땅에 뿌리를 깊게 내렸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의 정치범 통제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스탈린 체제의 가짜 재판

당시 스탈린 체제에서 1백여 만 명이 정치범으로 사형을 당했고, 1천만 명 이상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20세기는 유난히 피가 많이 흐르는 시대였지만 스탈린 체제도 참혹한 살인독재였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의 통제제도는 격식을 꽤 중요시했던 편이다. 대규모 학살정책을 펼 때에도 소련 당국자는 놀라운 정도로 겉치레에 신경을 썼다. 그 수많은 희생자들이 모두 재판도 없이 감옥으로 가지는 않았다. 소송 절차도 있었고 많은 경우에 변호인까지 있었다.

물론 이 재판은 절차가 10-15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도 소련 당국자는 이러한 재판을 비롯한 법적인 격식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짜 재판’ 중에서도 정치범에 대한 소련의 입장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사례가 ‘법정 쇼’ 또는 ‘재판극(劇)’으로 알려진 1937-38년의 모스크바 재판이다.

당시에 숙청당한 소련 최고 지도자 대부분은 ‘공연 재판’을 받았다. 국내외 기자들과 방송국의 마이크 앞에서 그들은 ‘외국 간첩’임을 자인하고 여러 가지 파괴행위를 계획, 실시했다고 진술했다. 재판은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마치 연극처럼 진행되었다.

구공산권 국가, 소련 지시로 정적(政敵) 숙청도

북한에도 ‘재판극’이 있었다. 1953년의 이승엽 사건이나 1955년 박헌영 재판은 대표적인 재판극이었다.

1950년대 초 소련의 압력이나 영향 때문에 신흥 공산권 국가들은 거의 다 이러한 재판을 진행하였는데, 실권을 잡은 독재자들은 정치적 경쟁자들을 ‘미국 간첩’이나 ‘반소(反蘇) 파괴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이러한 재판극은 동유럽에서도 모스크바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실시됐을 뿐 아니라 소련에서 파견된 고문단에 의해 계획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공재자료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북한의 경우, 확실치는 않지만 소련 당국자들이 이승엽, 박헌영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재판의 개념 자체는 1937-38년의 모스크바의 ‘재판극’을 모방한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쓸모있는 바보’ 래티모어

물론 1천만명이 넘는 소련 정치범 중 ‘재판극’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치범 딱지가 붙은 사람들은 10-15분 동안의 비공개 재판을 거쳐 장기수나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정치범 가족들이 희생자의 운명에 대해 알 수는 있었다. 가족들은 체포 당한 사실뿐 아니라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정치범은 조사 받을 때 집에서 오는 편지나 소포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사형을 선고 받았을 경우 가족에게 진실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대부분 “편지를쓸 권리가 없는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는 거짓말 하고, 10년 후에 알아보면 옥사했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사형선고가 아닌 경우에 가족들은 정치범의 형기까지 알 수 있었다.

소련 당국자들은 소련에 수용소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1930년대 초 ‘인간 개량(改良)’의 장소로 선전한 수용소는 영화나 소설의 배경이 되었지만 형무소, 노동 수용소에 대한 언급은 언론 매체에 등장했다.

1944년 여름 소련정부는 미국 조사단이 북방 시베리아에 위치한 수용소 방문까지 허락했다. 물론 사전에 미국 조사단에게 보여줄 것을 공연처럼 준비했고, 어떤 경우에는 수감자들을 경찰관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게다가 당시 미국 조사단 단장이 래티모어 (Owen Lattimore) 교수였는데, 그는 대표적인 ‘쓸모있는 바보’, 즉 친공(親共) 지식인이었다. 지금 이러한 사람들은 한국 외에는 별로 없으나 당시 미국과 유럽에는 너무 많았다.

래티모어 같은 사람은 수용소의 실태를 노출할 뜻이 전혀 없었다. 귀국한 래티모어는 수용소 관리자들의 취미가 얼마나 세련되고, 그들의 책임감이 얼마나 높고, 그들 덕분에 수감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좋은가에 대해 칭찬하는 글을 쓰곤 했다.

1943-44년은 소련 수용소의 역사에서 사망률이 15%에 달한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동맹국인 소련의 도움을 필요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믿는 듯했다.

북한은 스탈린 제도보다 뒷걸음

북한의 정치범 통제제도는 원래 소련제도의 복사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소련과 달라졌다.

1950년대 말 이후 북한은 법적인 격식을 갖추려 하지 않았다. 그 이후 ‘정치범’이라는 딱지가 붙은 사람은 하루 아침에 없어졌다. 쥐도 새도 모르고 끌려간 정치범은 완전히 해방불명 되었다. 정치범 가족들은 요덕 15호 관리소와 같은 가족 수용소로 가지 않을 경우, 사라진 정치범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소련 체제를 만든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민주운동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나라를 만든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혁명주의에 물든 연안 출신이거나 만주 유격대 투쟁 시절 폭력을 자연스럽게 접한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소련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건설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경험 때문에 법 존중사상을 버리지 못했고, 다만 그 사상을 왜곡시켰다. 그러나 법을 위장한 살인 제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북한은 유난히 무서운 태러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스탈린의 소련과 다른 점은 이 체제를 합법적인 치안 통제체제로 위장하는 대신, 북한은 은폐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스탈린 소련이나 김일성-김정일의 북한은 세계사에서 가장 참혹한 정권으로 기억될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 -주요 저서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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