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서울을 방어하라 …밀려오는 적 전차에 대항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그들의 1단계 목표인 수도 서울의 조기점령을 위해 개성과 고랑포 방면에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을, 동두천과 의정부 방면에는 제3사단과 제4사단을 배치했다. 38도선에서 수도 서울에 이르는 단거리 접근로는 철원-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불과 50㎞에 불과했다.


이 축선은 철원-연천-의정부에 이르는 경원가도와 김화-의정부에 이르는 한 개의 도로가 의정부에서 합류되어 서울에 이르는 단일로였고 별다른 하천 장애물도 없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북한군은 이 접근로를 택하였고, 아군도 이 축선을 적의 접근로로 판단했다.


북한군의 주공 좌일선은 제3사단이 제109전차연대의 지원 하에 포천가도로, 우일선은 제4사단이 제107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으며 동두천가도로 진출하여 의정부를 양쪽 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국군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예하 제1연대를 동두천 방면에, 제9연대를 포천 방면에 각각 배치하고 적의 침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전차를 앞세우고 아군 진지를 계속 격파하며 침공해 온 반면, 아군은 57㎜ 대전차포와 로켓포를 집중 배치하고 대응에 나섰으나 역부족으로 분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 포천과 동두천, 그리고 마침내 의정부마저 적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수도 서울의 운명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편 동두천 전선에서 분전하다가 창동 저지선까지 후퇴해 온 제7사단 1연대장 함준호(咸俊鎬) 대령은 불과 1개 대대 정도의 예하 장병들을 창동 북방 62고지 후방에 집결, 배치시켰다.


마지막 결전을 위한 작전을 구상하는 도중 적의 전차가 우이동 골짜기로 접근해 오는 것을 목격한 그는 적 전차를 격파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인식했다. 그는 작전장교와 연락병을 대동하고 접근로로 다가가 2대의 적 전차에 맞섰다. 전차를 폭파하기 위해 수류탄을 뽑아 든 순간 적의 선두 전차는 그의 일행을 향해 전차포와 기관포 사격을 가했다.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그가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손에 쥔 채 쓰러지자 작전장교가 달려들어 후송에 나섰으나 그는 도중에 전사했다.


그는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해 경기도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재학 중에는 일본인 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학생대대장까지 지냈으며, 오늘날 서울대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조국의 해방을 맞아 국군창설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오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그는 1946년 2월 18일 졸업과 동시에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되면서 10050의 군번을 부여받는다.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함 장군을 예하 장병들은 장군의 말이 없어도 충직하게 따르곤 했다. 이러한 장군의 성품은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서 공비들을 자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함 장군은 국군에 의해 통비(通匪) 혐의를 받던 자가 스스로 찾아와 “이틀만 석방해주면 국군이 탈취당한 무기를 찾아오겠다”하자 그를 풀어주었다. 이틀 후 그는 탈취한 무기와 함께 통비분자 16명을 연대 CP로 데려왔다. 이유를 묻자 그는 “함 장군의 말씀과 어진 성품에 감복하여 자수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함 장군은 부하와 심지어는 적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덕장이자 전투에 임해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용장이었다.


개전 이래 연대장으로서 최초의 전사자가 된 함 장군은 전쟁초기 모든 불리함을 딛고 수도 서울을 사수하고자 결사의 각오로 싸운 지휘관이었으며, 그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은 모든 지휘관의 귀감이 됐다.


정부는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1년 7월 26일 군인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육군준장으로 추서하였다. 현재 장군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7에 안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