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에 조급하지 말고 인간적 신뢰 중시해야”







▲탈북자 2만시대 성공케이스 박수현 한의학 박사겸 원장./김태홍 기자

한국에 정착한 2만 명의 탈북자들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한국과는 다른 교육 과정, 직업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탈북자들에게 있어 자신에게 맞는 진로와 직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다.


이런 힘든 조건에서도 북한에서의 전공을 살려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성공 탈북자’들의 공통점은 먼저 자신의 적성과 장기에 맞는 목표를 명확히 세웠다는 데 있다. 그 다음 자신의 꿈을 위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땀과 노력을 쏟았다. 그들의 성공 스토리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인내와 노력의 시간들이 녹아들어 있다.


탈북자 출신으로 1호 한의학 박사 타이틀을 따낸 박수현 씨도 스스로가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값진 노력들을 기울였다. 1993년 한국에 입국한 박 씨는 2001년 한의사 자격증을 딴 데 이어 2010년에는 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모두 탈북자로써는 첫번째 케이스다.


박 씨가 운영하고 있는 경기도 성남시의 한의원을 방문해 탈북자들의 성공적인 한국 정착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들어봤다.


-북한에서도 한의학 공부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면 북한에서도 엘리트 계층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탈북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묘향산에서 8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1989년도에 청진의학대학 한의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1993년도 쯤인가 친구가 와서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 가는데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상당히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북한에서는 외국 사람들이 북한에 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친구의 친척이 한 첫마디가 “김일성, 김정일 그XX들 때문에 너희가 못살아”라는 것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 ‘위대한 영도자’같은 수식어 없이 동네아저씨처럼 부르는 말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이해도 가지 않았지만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내가 북한에서 살아 온 세월이 허망해 졌다. 내가 그 친척 분에게 “중국이 너무 잘산다”고 얘기하니 그는 “한국에 비하면 우리(중국)는 오히려 거지”라고 말했다. 또 “1년만 한국에서 일하다 오면 가족 전체가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벌고 온다”고도 말하더라. 그때부터 한국에는 무엇인가 다른 세상이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한국대사관을 통해 입국하려했으나 대사관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한국에는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기때문에 톈진(津)에서 밀항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1996년에 결혼을 했다. 아내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1998년과 1999년 걸쳐 브로커를 통해 데려왔다. 현재 북한에는 가족이 전혀 없다.


-1993년은 지금보다 한국에 온 탈북자 수도 적었던 만큼 이해가 부족했을 것 같은데 사회적 편견이나 시선, 제도적 미흡함은 없었나.


당시에는 탈북자 1명에 담당형사들이 한 명씩 붙었다.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보고하겠지만 내가 믿을 사람은 담당형사밖에 없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하라는 것을 했다. 비밀행동을 하지 않았다. 내 편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 사람을 많이 믿으니까 데리고 다니면서 자동차 면허도 따게 해주고 컴퓨터 등을 배우게 해줬다. 다른 친구들은 담당형사와 싸우더라. 나는 담당형사가 해준 여러 조언들을 많이 받아 들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그 당시 탈북자가 별로 없어서 지금 같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탈북자들이 많이 늘어나 경계하는 시선은 조금 줄었지만 당시에는 반공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사람을 사귀려 해도 지금보다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남녀관계는 심했다. 탈북자라고 하면 불에 댄 것처럼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정부가 취업과 교육을 장려하는 정책은 비슷했다.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문제는 동네 사람들의 경우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경계심은 적었지만 깊이 알려고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인사나 하는 사이였다. 한국 사람들도 지역 사람들과 많이 친한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탈북자라고 해서 크게 문제는 없었다. 북한에서도 친한 사이가 아니면 소통하지 않는 건 똑같다. 자신이 친해지려 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면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지역 주민들과 문제없이 지내고 있다.


– 한의사가 돼야 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부터 한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시 담당 형사는 나하고 24시간 붙어있었는데 그가 전립선 병을 앓고 있었다. 5~10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야했다. 보다 못한 내가 북한에서 한의학을 다루고 했었으니까 경동시장에 가서 약재를 사서 약을 지어줬다. 당시 그는 50만 원짜리 한약을 먹고 있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지어 준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형사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의대를 다녀야겠다”며 한의대 입학을 적극 도와줬다. 


– 대학교 다닐 당시 탈북자라는 신분을 밝혔었나. 또 북한 교육과 비교했을 때 한국에서의 공부가 힘들지는 않았나.


대학교에 입학하고 탈북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혔다. 하지만 동기들이나 교수님들은 군대 다녀온 편입생이 장난치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나니 탈북자라는 것을 알더라. 하지만 별다른 편견 없이 평소처럼 지낼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한글만 사용했지 영어나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자주 사용해 어려움이 있었다. 혼자 할 수 없어서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좌절도 많았다. 하지만 공부하기로 한 만큼 무엇이든지 해야겠다 싶었다. 


또 가족도 있었고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탈북자 전체문제로 부각될 수도 있다는 중압감이 있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박사까지 이룰 수 있었다. 


–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으며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을 텐데.


인간관계가 어려웠다. 박사는 담당교수만 사인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좋아야하고 끈기도 필요하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였다. 사람하고 관계가 안 됐으면 석사나 박사까지 해줬겠나. 내가 혼자서 할 수 없어서 친구들의 도움과 교수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극복 방법으로는 미움 받지 않게 너무 튀는 행동을 하지 않고, 무난하게 행동했고, 말하기 보다 많이 경청 했다.


– 한의사에 이어 석사와 박사까지 도전하고 그 것을 이루었다. 도전을 계속한 계기는 무엇인가.


어차피 마지막까지 가는 것이 박사나 교수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결국 배우는 것이었다. 물론 한의사만으로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지만 석사·박사를 거치면 환자들은 한의사이면서 박사한테도 침을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의 무게가 다르다.


나도 박사를 취득해서 좋겠지만 내가 박사라는 믿음을 환자에게 줄 수 있다. 환자가 의사를 믿는 마음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 또 이같이 도전을 계속하면 이후에 탈북하는 사람들도 선배 탈북자가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니 주변에서 ‘북한에서 와서 어렵더라도 도전하면 저렇게 박사까지 되더라. 대단하다’라는 평이 많았다. 한의사가 됐을 때와는 또 다른 시선이었다.


– 앞으로 또 다른 것에 도전할 의향이 있나. 


솔직히 꿈을 크게 꾸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해온 것이다. 박사까지 17년 걸렸는데 지금도 영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 한 3년 열심히 해서 미국의 하버드 같은 곳에 가서 철학박사도 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박사학위도 따면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내가 할 일이 생길 것 같다.


환자를 많이 치료하는 것도 꿈이지만 내적인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싶다. 내가 크는 것이 탈북자가 도전하는 것을 알리는 계기이고, 통일 후 철학이 북한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조만간 탈북자 2만 명 시대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들에게 성공 노하우를 전해준다면.


북한에서의 생활과 한국에 들어와서의 삶이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에서 내가 열 살이었어도 한국에 오면 한 살이다. 다른 사람 시선으로 봤을 때 못하게 보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분노나 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한국 사람보다 못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말고 내 위치가 한국에서 매우 낮은 위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용기는 가지고 있으되 내 위치를 인정하고 참는 것이 무한한 가치를 품는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 빠르게 출세하거나 꿈이 빨리 이뤄질 순 없다.


무엇을 하나해도 최소 10년씩 해야 저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알리고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보이는 신뢰만 얻으려 하면 안 된다. 보여지기 식이 아니라 보이든 보이지 않던 열심히 해야 한다. 신뢰가 쌓이면 한국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잘해준다. 내가 여기서 한의원 10년째 하고 나서야 사람들의 불신이 사라졌다.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여기가 제2의 고향이라는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한의원을 찾은 지역민들을 위해 박 씨는 종종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지역민들을 맞이했다. 그 영향인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 또한 더위로 지쳤던 몸에 활기가 도는 듯했다.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묘향산 한의원(左)과 박 박사(右). 김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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