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평양-하노이의 역사 시나리오

올 여름 필자는 여러번 베트남에 갔다 왔다. 경치가 아름답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어 마음에 들었다.

가난하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베트남을 보면서 필자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베트남과 한국은 쌍둥이 나라라고 할 정도로 공통점이 많다. 인구와 국토도 대략 비슷하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와 문화에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베트남도, 한국도 오래 전부터 유교문화권에 들어가 한문과 유교 등 중국식 문화 전통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베트남과 한국은 전근대 시기에 문화, 정치, 사상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또 중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 한국은 실리적인 외교와 용감한 무장항쟁으로 자신의 독립을 잘 지켜오면서 또 하나의 중국의 성(省)으로 흡수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며칠만 지내보면 영문으로 쓴 베트남 간판을 보면 한자 단어가 많아 기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사무실에서 ‘Cong An’라는 간판을 보면 바로 ‘공안(公安)’이라고 알 수 있고 ‘Viet Nam Cong San Dang’이란 말의 의미를 알아보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대와 현대에 들어와서도 한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베트남과 한국은 식민지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베트남은 1884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한국은 1905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양국은 또 제2차 대전 후 해방되자마자 분단 당했다. 양국의 분단은 국제적 냉전질서와 내부 좌우 갈등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대체역사’의 시나리오

필자는 베트남에서 만난 미국 시사잡지의 특파원에게 “서울에 와 보시오! 서울을 보면 2038년 경 하노이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거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기자는 “얼마 전 북한에 갖다온 베트남 친구는 평양이 1980년의 하노이와 아주 비슷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뜻이 있는 ‘농담’이라고 생각된다. 베트남은 북한보다 잘 사는 나라지만 남한보다 아주 가난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한국도 다른 길로 갔더라면 현재 서울은 하노이처럼 됐을 것이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대체역사’, 즉 현실에는 없었으나 가상의 역사를 가정해서 이후의 전개과정을 분석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희의적이다. 그래도 베트남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한국과 월남의 1945년 해방은 독립의 기쁨에서 곧 분단과 국내전쟁으로 이어졌다. 1953년 판문점에서 조인된 휴전협정은 한국전쟁을 멈추게 했다. 1954년의 제네바 협정은 좌우대립을 국가분단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이는 베트남의 국내전쟁으로 이어졌다.

베트남의 사정은 한국과 큰 차이가 있었다. 1953년 휴전 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반대로 재침략을 시도하지 못했다. 소련과 중국은 동북아가 중요한 지역인 만큼 또 하나의 무장충돌이 너무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한반도의 적화통일은 김일성과 측근들의 꿈으로 남았다.

베트남은 그렇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당은 1954년 나라의 분단과 남베트남의 존재를 인정하는 제네바 협정을 소련과 중국의 외교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조인했다.

그러나 하노이 권력층은 제네바 협정에도 불구하고 대남작전은 매일 강화하고 있었고 1960년대 남베트남에서 벌인 유격전을 지도했다. 결국 이 대남작전은 대규모 국내전쟁과 미군의 파병으로 절정에 달했다.

20여년 동안 공산주의에 항쟁했던 남베트남 정부는 마침내 민중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경제를 살리지도 못한 이유로 1973년 미군철수 이후 1975년 공산세력의 남침에 무너졌다.

그러나 현대 베트남을 북한과 비교하면 훨씬 더 잘 살고 더 자유로운 나라임이 분명하다.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에게 고기국에 비단옷, 기와집에서 사는 것을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1990년대부터 진짜 고기를 먹고 기와집에서 살게 되었다. 또 대도시에는 오토바이가 없는 집이 없고 텔레비전도 많이 보급되었다.

물론 베트남은 북한보다야 잘 살지만 아직은 가난한 나라다. 논밭에 기계가 거의 없고 개인용 자동차는 수도에서도 보기 드물다. 하노이에는 고층건물도 거의 없고 현대식 아파트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통계는 이러한 인상을 확인해준다. 베트남의 일인당 GDP는 2,800 달러다. 북한보다 2-3배로 더 높지만 남한보다 5-7배로 낮은 편이다.

지금 베트남은 정치 부문에서도 예상보다 자유가 많다. 하노이대 교수들은 정부가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눈 베트남 사람들 중에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트남의 성공적인 중국 따라 배우기

필자는 또 베트남 민속박물관에서 아주 재미있는 전시관을 구경했다. 1970-80년대의 베트남 배급제를 다룬 전시관이었다. 당시에 사용한 배급표도 있고 직위에 따른 배급량을 기록한 표도 있었다. 배급소 앞에 길고 긴 줄을 보여주는 사진도 있다. 1980년대에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자전거도 필요한 부품을 배급제를 통해서만 받을 수만 있었다. 물론 정부의 노력에 불구하고 암시장도 활발했다.

1975년 통일후 베트남은 처음에 북한과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쌀을 비롯한 거의 모든 식량과 소비품은 배급의 대상이 됐고 공산당 정권은 개인 경제활동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공업품 생산도 국가소유 공장을 통해 경영했다. 그 결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경험한 것과 유사했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었고 경영자들은 생산 효과보다 정치 캠페인에 신경을 썼다. 결국 물건과 상품 부족현상은 계속 심해졌다. 1985년 무렵에는 해마다 3모작을 하는데도 기근까지 경험했다.

그래서 1980년대 말 베트남 공산당은 중국의 모범을 보고 도이모이(Doi Moi)라는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기본측은 사회주의 간판만 내걸고 사실상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동시에 정치부문에서는 공산당의 정권독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치안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물론 베트남 공산당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북한 노동당보다 쉬웠다.

첫째, 베트남 공산당은 김일성과 같은 일인 독재자나 왕조식 ‘가정독재’도 물론 없었고 집단지도를 실현했다. 그래서 고거 정치노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최고 지도자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1975년 남베트남이 무너진 뒤 베트남 공산당은 ‘또 하나의 베트남’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개혁을 막는 이유 중 하나가 개혁개방이 시작되면 주민들이 남한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알게 되고 김정일 정부를 전복해서 즉각 통일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이러한 위협이 없었다.

베트남의 개혁은 그 모델인 중국의 개혁보다 더 성과가 좋았다. 최근 경제 성장율은 8-9%에 달한다. 또 하나의 ‘아시아의 호랑이’가 될 수 있다. 1980년대에 기근까지 경험한 베트남은 개혁개방후 세계 3위의 쌀 수출 국가가 되었다. 필자와 함께 베트남을 갔다온 한국 대학생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우리 나라 60년대와 같다”고 말했다.

정권보다 주민 생명 생각한다면…

베트남의 현대사를 보면 1950년 가을 한반도에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도 적화통일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미국의 파병결정이 불가피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만약 미국의 파병이 없었다면 1951년 무렵에 베트남처럼 적화통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북한에 의해 통일된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확하게 답변하기는 꽤 어려운 질문이지만 현재의 베트남은 이러한 가상의 ‘통일조선’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통일조선’의 경우에도 톨일 이후 대규모 숙청과 개인숭배가 불가피해 보인다. 또 ‘통일조선’의 최고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중국의 영향 때문에 강제동원 캠페인과 프로파간다를 통해 경제를 살리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쓰라린 경험이 보여주듯 사상교육과 절대적 동원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정책은 자원낭비와 민중의 고생만 초래한다. 그래서 한반도의 공산정권도 나중에는 ‘살인적인 유토피아’를 조용히 접어두고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시장개혁, 즉 ‘파행하는 자본주의’ 정책을 실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너무 늦어 보인다. 중국의 개혁은 1970년대 말부터, 베트남의 개혁은 1980년대 말부터 했으니까, 김일성 치하의 ‘통일조선’도 1980년을 전후하여 시작됐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역사에서 한국의 고속성장은 1960년대 초부터지만 가상의 역사 시나리오에서는 25년 늦게 시작됐을 것이다. 따라서 2006년 서울의 모습은 1970년대나 80년대 초의 모습과 비슷했을 수 있다.

베트남은 또 하나의 한국역사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베트남이 80년대 말 도이모이 개혁을 시작했을 때 북한도 개혁을 일부 시도했다. 당시 북한에서 ‘8.3 운동’도 있었고 농업에서도 개인관리 실험도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공산권 붕괴를 본 북한정권은 개혁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정권과 특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으로 돌아왔다.

결국 기근을 극복한 베트남과 달리 북한은 기근과 경제붕괴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북한정권이 자신의 특권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평양도 지금의 하노이처럼 비록 가난하지만 성장하는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또 누구나 고기국을 먹을 수 있는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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