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평화’ 이유로 동독 인권문제 경시한 적 없어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인권의 보장은 평화, 통일과 더불어 서독 기본법의 3대 명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동독주민의 인권보호가 서독정부의 독일정책에서 항상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은 국내외 환경변화와 각 정권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서독정부는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전에는 공개적 입장 표시, 국제기구에서의 문제제기 등 원칙론적인 대응에 치중했으나 1972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에는 ‘정당한 분노의 표시’보다는 동독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주민통제 완화, 서독이주 및 여행자유의 확대, 각종 처벌의 경감 등 동독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동독 인권문제에 대한 서독정부의 기본입장


인권보장은 서독 기본법에 명시된 평화, 자유(인권) 및 통일 등 3대 명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서독정부의 독일정책에서 항상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가 되어 왔다. 그러나 3대 명제 가운데 자유가 통일보다 우선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평화와 자유, 평화와 통일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동독 및 동유럽권과의 화해를 통해 독일과 유럽의 평화를 확보하는 문제가 인권(자유) 및 통일 문제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여부는 역대 정권에 따라 국민적 합의가 달라졌다. 특히 사민당의 신동방정책 추진 이후부터는 점차 ‘평화’ 명제의 중요성이 커졌으나 ‘평화’를 이유로 인권(자유) 문제가 중요성을 잃은 적은 없었다.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전의 정책


분단 초기 서독정부는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거나 국제기구에서의 문제제기 등 선언적 의미의 활동에 치중했으나, 동서독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자 동독정부와의 막후교섭을 통해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함으로써 동독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동독이 다른 공산국가에 비해 불법구금, 고문 및 가혹행위 등이 적은 편이고, 동독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어려운 상황에서 동독의 인권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시’에 치중하는 것은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독정부는 동독정부에 대해 ①동서독 주민 간의 이주, 왕래 및 가족 재상봉의 확대, ②국경 탈출자에 대한 사살명령 중지 및 탈출기도자에 대한 공화국 도주죄 형량(5~8년 징역)의 경감, ③정치범 구금, 반체제 인물에 대한 박해 및 서독이주 강요, 서독 이주자에 대한 동독방문 제한의 해제, ④동서독 주민 간의 통신 및 정보교환의 자유 확대 등을 달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있었던 특기할 사항으로는 1961년 11월 동독의 인권탄압 사례 축적을 위해 ‘중앙기록보존소’를 설치한 것과 1962년부터 동독과 정치범 석방교섭을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동독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각 주 정부들이 합의하여 설치한 것으로 1990년 통일 시 까지 동독주민의 인권탄압에 관여한 동독 경찰, 판·검사, 비밀경찰(Stasi) 요원 및 협조자 등 8만 여명에 대한 기록을 유지해 왔다.


동독 정치범 석방교섭은 공산치하에서 고통 받는 동포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한다는 목적 하에 추진된 사업으로, 1962년부터 1988년까지 총 34억 6400만 마르크(약 1조 8000억 원) 상당의 금품을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 3만3755명과 그 가족 25만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오는 사업으로서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대표적인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1·2차 동서독 정상회담에서의 인권문제 논의


1970년 3월 및 5월 개최된 1·2차 동서독 정상회담 시 서독 측은 국제적인 일반원칙을 들어 인권존중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후 1972년 12월 체결된 동서독 기본조약에 인권조항을 삽입도록 했다.


1970년 3월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개최된 제1차 정상회담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는 “자유로운 왕래와 인권신장을 이룩하는 관계발전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임을 분명히 했으며, 그해 5월 서독 카셀에서 개최된 제2차 정상회담에서는 “국제법의 일반원칙으로서의 인권, 평등권, 평화적 공동번영 및 차별금지의 기반 위에서 관계를 맺겠다는 의사를 공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기본조약 제2조에 ‘인권보호’조항을 삽입하는데 성공했다.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의 정책


1973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 동서독이 모두 유엔인권협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가입했고, 동서독 기본조약에도 인권조항이 삽입되어 있어 기본조약 상의 내정불간섭 원칙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동독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히 갖고 있었다.


또한 1973년 7월 31일 서독 연방헌법재판소가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한 위헌소청 판결문에 서독정부가 대동독 관계에서 인권보호를 위해 준수해야 할 5가지 원칙을 부과함에 따라 화해·평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의 인권문제는 서독의 대동독 정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서독 정부는 유엔인권협약을 근거로 국제기구 등에서 서독정부의 기본입장을 표명하고 동독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에는 기본법의 명제에 따른 원칙적 입장표시는 주로 국제기구를 통해서 하고 실질적 인권개선 문제는 동독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동독에 대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공개적으로 인권개선을 촉구하거나 ‘정당한 분노’를 표시하는 것은 상호관계를 경색시켜 대화를 통한 해결을 어렵게 하고 동독정권의 주민통제 강화를 유발한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동독인의 서독이주, 동서독 주민의 방문여행 확대, 상호 간의 경제교류 확대를 통한 동독주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실질적인 인권개선을 가져온다고 판단하여 인도주의의 실현에 치중했으며, 이를 위해 민간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동독정부와의 비밀교섭을 통해 대가를 지불하고 특정문제에 양보를 받아내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1983년 6월과 1984년 7월 서독은행이 총 19억 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한데 따른 대가로 동독정부가 국경지역에 설치된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하고 동서독 주민에 대한 여행규제를 완화토록 한 것은 이러한 노력이 거둔 성과이다. 그러나 사민당 정치인들이 동독 측에 대해 주민의 인권보장이 정부와 주민간의 신뢰강화 계기가 되므로 체제위협 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으나, 상호 간의 교류가 확대될수록 동독 측이 자기 체제의 취약성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어 일정 선 이상으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서독정부는 자유와 인권의 보장 문제를 포기할 수 없는 대원칙으로 설정해 놓았으면서도 동독주민의 실질적 인권개선을 위해 온건하고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곡예’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사회에서의 문제제기를 통해 동독의 인권문제가 개선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경제협력을 동결시키는 전략은 동독주민의 경제적 고통을 심화시키고 이산가족의 방문·교류를 저해할 뿐 아니라, 동독정부로 하여금 점진적인 인권개선 마저 포기케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측의 반응과 대처


동독 측은 서방의 인권보장 요구를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을 지원하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로 인식하면서 서방과 공산권은 인권개념이 서로 달라 서방측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방 측은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중시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인권실현을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구조가 더욱 중요하며, 모든 인권은 동독 헌법의 기본정신과 목표에 합치되는 경우에만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독 측은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체제가 정착되는 것과 비례하여 가급적 국제규범을 준수하고 동독주민의 생활개선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CSCE 회의에서 인권문제와 정보교류 문제가 자주 거론됨에 따라 1970년대 후반 이후 서독방송과 텔레비전 청취를 허용하고 1987년 사형제도를 폐지한 것, 서독과의 협상을 통해 경제적 대가를 받은 후 국경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한 것, 동독주민의 이주와 여행 허가범위를 확대한 것 등은 국제여론을 의식한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 동독정부가 주민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고 생활수준 향상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서독과의 체제경쟁을 의식한 것으로 서독정부의 화해·협력 정책이 거둔 성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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