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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잊지 말아 달라.”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68일 째 되던 날, 서울 청량리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李美一) 이사장의 집에 낯선 사람이 들이닥쳤다.
‘유소위’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치보위부 요원은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며 고무신에 반바지 차림이던 아버지 이성환씨를 데리고 갔다. 당시 청량리에서 유기공장을 운영하던 이씨가 서북청년단(극우반공단체)에 기부금을 냈다는 것이 연행 이유였다.
58년 간의 긴 헤어짐의 시작이었다. 이 이사장은 두 살 때 끌려간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꿈속에 찾아오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전시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아버지가 끌려갔던 바로 그 자리에 가족협의회 사무실을 만들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도 개설했다. 자료원은 국내외를 통틀어 한국전쟁 납북자 실태에 대해 가장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이 이사장과 가족회 회원들은 지난 10년 동안 납북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 달라고 통일부 문턱이 닳도록 쫓아 다녔다. 하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이 이사장은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정부 어떤 단체에서도 전시 납북자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 이사장에게서 전시 납북자의 실태와 피해 가족들이 요구하는 해결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전쟁 납북자들에 대한 생사 확인을 요구하는 가족들의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납북(拉北)인지 월북(越北)인지 구별할 기준도 없으며, 그 규모를 증명할 명부(名簿)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에 대해 이 이사장은 “우리는 수 십 년 동안 연좌제에 묶여 고통을 받아왔다. 전시 납북자들에 대한 증거가 없다면 정부에서는 무슨 근거로 우리 가족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했다는 말인가”라며 항변했다.
그러면서 그는 “1950년 12월 당시 최초로 정부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에는 총 4천616명의 인적사항이 피살, 납치, 행방불명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며 “그 당시 정부는 피살, 납치, 실종 피해자를 엄격히 구별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새로 출범하게 된 이명박 정부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는 전시 납북자의 생사확인 만이라도 정부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납북자의 진실을 밝히는 문제가 남북관계에 장애가 된다는 관점부터 뜯어 고쳐야 합니다. 새 정부에서는 전시 납북자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전시 납북자들의 탈북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반세기 이별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에서는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북에 남은 또 다른 가족은 수용소에 끌려가야 하는 북한의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