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던 리영희의 죽음

리영희 선생이 운명하셨다. 이제 선생은 좌우로 날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선생의 부고를 접하며 나의 기억은 87년 3월로 거슬러 올라 갔다. 또래에 비하면 난 참 지지리도 감옥 복이 많았는데 첫 인연의 주관자는 선생의 책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꿈 많은 신입생 한 녀석이 학교 문을 들어서려는데 ‘잠시의 검문’이 있었고, 녀석의 가방에서 불거진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은 그의 등교를 불허하였다.


인근 경찰서로 끌려가 이 책을 왜 구입했는지, 어디서 샀고 누가 사라 했으며, 누구와 토론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읽었고,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어떠한지를 죄다 적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나는, 그리고 전태일의 유서에 언급되었던 ‘내가 아닌 다른 나’들은 그 내용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선생은 우리에게 우상에 얽매이지 말고 무엇이 인간을 위한 길인가를 찾으라 호소했다. 그의 뉴욕 정전사태와 중국 대지진에 대한 묘사는 우리의 심리적 저지선을 위력적으로 허물었다. 선생이 비록 안병직 선생이나 박현채 선생처럼 학생운동의 혁명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반공주의를 허물어 혁명적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초를 탄탄히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공주의는 당시 학생운동이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을 억제시키는 사상적 힘이었고 역으로 군사독재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70년대까지의 학생운동과 그 이후 학생운동의 공통성과 차이성도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드러난다. 반독재민주주의운동이라는 공통성이 있었지만 70년대까지는 공공연하게 반공주의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학생운동은 그 저지선을 뚫고 질주했다.


그것은 빛이자 거대한 그림자였다. 반공주의의 심리적 저지선이 뚫리자 다양한 혁명이론에 대한 열렬한 탐구가 이뤄졌고, 그것은 도도한 열정과 결합하여 거대한 민주주의의 동력,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격동적인 동력을 만들게 되었다. 반공주의라는 이념적 무기가 위력을 상실하자 그 이후 집권세력과 기성세력은 사상의 영역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기초하고도 여전히 그 어떤 사상적·도덕적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역설은 이미 80년대에 시작된 것이었다.


거대하고 열정적인 민주화의 동력은 역설적으로 반동적인 사상과 동거했다. 해괴한 일이었다. 중국에서 이미 오류로 인정되어 비판받은 문화대혁명을 이상화하고 박제화된 소련 교과서를 들여다 공부하며 중국식, 소련식, 북한식으로 한국을 개조하려 했으니 해괴하고 반동적일 수밖에….


이 모순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해결되었어야 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 개혁개방의 성취가 뚜렷해지는 시점에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는 남았어야 했다. 수백만 북녘동포들의 비극적 죽음을 목도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해괴함과 결별했어야 했다. 어떤 도그마나 명성, 습관적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우상에서 벗어나 무엇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인가를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좌우의 날개로 비상하기 시작했어야 했다.


리영희선생이 그 시점에서 다시 우상과 이성을 역설했어야 했다. 그것이 오로지 선생이 걷고자 했던 지성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예찬한 문혁의 실체를 제자들 혹은 후학들에게 겸손하게 인정했어야 했다. 뉴욕정전사태가 끔찍했다면 수령의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 수백만이 아사를 해야 했던 그 절망의 시간을 용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문혁의 진실에 침묵했다. 그것도 모자라 2007년 북에 가서 권호응에게 “20, 30년 길러낸 후배 제자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외면 정도가 아니라 가해에 대한 동참이라니…당신의 역사적 평가를 어찌하려고 저러신 것인가? 80년대에 미쳤던 긍정적 영향까지 스스로 조롱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건만 선생은 왼쪽만의 날개로 날아오신 것인가? 그 왼쪽날개마저 타락하여 결국 스스로 욕되게 추락하신 것인가? 정녕 그렇게 마침표를 찍으신 것인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생과 이별하신 선생의 운명이 그래서 한없이 슬프고 안타깝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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