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진눈깨비가 날리던 어느 날 밤. 양강도 후창군 쪽에서 도강(渡江)을 하다 체포된 한 모 씨는 결국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고, 동행하던 10대(代) 조카도 마찬가지 신세로 전락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데일리NK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때는 바야흐로 수년 전으로 흘러 들어간다. 2010년대 초반 아이의 엄마는 중국에서 신분 없이 살다 한국행을 택했고, 이후 북한에 살고 있던 동생 한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남조선(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노모(老母)와 동생, 그리고 아들을 한꺼번에 데려오기 위한 계획을 전했다고 한다. 한 씨는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우선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눈앞에서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염려였다.
나이 어린 조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엄마가 보고 싶다’는 아이에게 ‘이제는 잊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만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고(長考) 끝에 내린 결론은 ‘먼저 조카만 보내자’였다. 그리고 한 씨는 중국 측 브로커와 약속된 장소에 조카를 데려다주기 위해 직접 조카를 등에 업고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한 씨는 평소 중국에 다니면서 밀수를 해왔기 때문에 압록강 물길을 꿰차고 있었다. 또한 국경경비대 감시를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오히려 화를 불렀던 것일까. 강을 건너고 있는데 북한 쪽에서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당장 돌아서라, 돌아서지 않으면 쏜다’고 고함을 쳤다. 순간 한 씨는 눈앞이 아찔했다. 자칫하면 ‘조카가 총에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사력을 다해 중국 쪽으로 헤엄쳐 갔다. 오직 조카를 살려서 무사히 엄마 품에 보내야 한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그 후 그는 정신을 잃었다.
며칠 후 그가 눈을 뜬 곳은 어느 군(郡) 병원이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은 군 보위부 반탐과 보위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당시 국경경비대는 돌아오라는 명령에 불복하자 바로 총을 3발 쐈다는 것이었다.
한 씨는 바로 조카의 안위를 물었다. ‘신변엔 아무 문제 없다’는 보위원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사실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후 도(道) 보위부 구류장으로 넘겨진 한 씨와 조카는 3개월 예심 끝에 관리소행 처분을 받게 됐던 것이다. ‘월남(越南)’ 혐의가 적용된 결과였다.
조사과정에서 조카는 10대 아동이라는 점, 아무것도 모르고 외삼촌을 따라갔다는 점 등이 고려됐지만, ‘성인이 되면 언제든 나라를 배반할 것’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가정의 모자(母子)는 영영 볼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됐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노모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또한, 한국에서 혼자 살게 된 10대 아이의 어머니는 ‘제 탓’이라며 신세 한탄만 늘어놓고 있다고 한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악명 높은 북한의 관리소. 그곳에는 아직도 기본적인 인권을 짓밟힌 많은 주민들이 병들어 시들어가고 있고, 그 가족들도 ‘생존’ 문제로 처절하게 발버둥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