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우리 정부의 승인을 받아 물자 지원과 방북을 추진 중이던 민간단체의 방북을 사실상 거부했다. 대북인도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말라리아 방역약품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과 접촉 중이었는데 이를 연기하자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5월 26일 민간단체로는 1년 4개월 만에 처음으로 대북접촉 승인을 받은 단체로, 이번 지원 사업은 새 정부 대북정책 기조 변화의 신호탄으로 해석되는 사업이었다.
북한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측에 방북사업을 연기하자고 밝히면서 우리 정부가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을 지지한 것을 문제삼았다. 유엔은 지난 2일 북한의 잇따른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 개인 14명과 기관 4곳을 제재대상으로 추가하는 대북제재 결의안 2356호를 채택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측 관계자는 북한이 “남한 정부가 유엔 결의안에 동참한 것에 대해 북쪽 인민들이 격앙돼 있다며 이런 상태에서 민간교류를 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 17주년을 맞아 6.15 남북공동행사를 추진 중인 6.15 남측위원회에도 새 정부의 대북기조에 비판적인 북측의 의견이 전달됐다. 6.15 남측위 측 관계자는 북측이 전달해온 내용에 “제재와 압박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6.15와 관련된 교류를 지속할 의사가 있는지 우리 정부의 입장을 주시하겠다”는 취지의 내용이 들어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그러면서 6.15 남북공동행사를 평양에서 열자고 밝혔다. 우리 측 민간단체는 행사를 개성에서 열자는 입장이었고, 우리 정부도 평양보다는 정치적 부담이 적은 개성을 선호하는 상황이다. 북한이 ‘평양 6.15 행사’를 주장하는 것은 새 정부가 앞으로 대북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이는지 주시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정부, 다소 조급한 ‘남북관계 개선’ 메시지
정부는 꽉 막혀있던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면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민간교류 등 남북관계 주요 사안들을 유연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에 대해 전세계적인 대북제재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동조하면서 제한적인 수준의 남북관계를 뚫어보겠다는 것이다. 전쟁 중에도 대화를 하는 법인데, 남북 간 모든 접촉이 중단되고 연락망마저 단절된 지금의 상황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러한 정책 변화를 시작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메시지를 발신했다. 5월 22일 오전 통일부 대변인이 민간교류를 유연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오후에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기자들과 만나 “실무급 차원에서부터 대화를 시도해봐야 하며, 인적교류 사회문화스포츠 교류 같은 것은 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도 5월 10일 국정원장 후보자로 지명되자마자 “조건이 성숙되면 평양에 갈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 자체로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을 계속 쏘아올리는 등 변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언급들이 연달아 나오니,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너무 보채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우리 정부가 바라는대로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북한으로서는 우리 정부의 정책변화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를 훼손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싶을 것인데, 남한 정부가 적극적인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니 이번 기회에 남한 정부가 어디까지 끌려오는지 보자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북한이 민간교류에 일차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우리 정부의 대북기조를 비판한 것은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을 좀 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오겠다는 압박에 다름 아니다.
대북정책, 한 보가 아니라 반 보씩만 앞서가야
6.15 남측위원회는 “행사 개최 지역이 북측지역인 만큼 북측의 의견을 존중해 평양 행사를 수용하고 정부에 방북신청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앞으로 ‘평양 6.15 행사’를 우리 정부가 수용할 것을 촉구하며, 정부의 이번 결정을 향후 남북관계의 척도로 삼겠다는 압박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북한이 도발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평양에서 남북공동행사를 여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정부로서는 전체적인 제재 기조를 유지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만 교류를 확대해나갔으면 하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 정부의 그런 속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순순히 원하는 대로 해주지는 않겠다는 태세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대북문제에 있어 조급성을 보이면 보일수록 자신들이 키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더욱 목에 힘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북한 문제는 한 보가 아니라 반 보씩만 앞서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