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사망한 북한의 박성철(95) 노동당 정치국 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은 북한이 ‘혁명 1세대’라고 부르는 인물군의 한 사람으로, 고 김일성 주석의 유일사상체계 및 노동당 유일지도체제 구축에 기여한 최측근중 한 사람이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경북 경주 출신인 그는 1934년 4월 항일유격대인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해 김일성과 함께 활동하다 광복 후 1945년 8월 입북했으며, 6.25전쟁 때 군사단장, 해군사령부 부사령관, 최고사령부 정찰국장의 직책을 가졌었다.
전후에는 불가리아주재 대사와 외무성 부상, 당 국제부장,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을 지내며 외교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성사에 주역의 하나로 참여했다.
그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에 이어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서울을 방문, 이후락 부장과 회담했다.
그는 7.4공동성명 발표 직후 이 성명의 이행을 위해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인 김영주 부장을 대신해 그해 12월 서울을 다시 비공개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1970년 당중앙위원을 거쳐 1972년 정무원(현 내각) 부총리, 1976년 정무원 총리를 지내고 1977년 12월부터 1998년 9월까지 20년 넘게 국가부주석으로 있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국가장의위원회 서열 5위로, 이듬해 2월 1995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망 때는 국가장의위원회 서열 4위로 발표되기도 했으며, 1992년과 1993년 각각 ‘공화국 영웅’ 칭호와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1989년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을 때 그는 “이제는 인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힘을 써야 할 때”라며 행사 개최에 불만을 표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계가 껄끄러워졌다고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는 김일성 사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명실상부한 최고 직책인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으로 옮기면서 일선에서 물러났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