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거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논쟁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전자파 유해 논란이다. 여기엔 ‘기시감(旣視感)’이 있다. ‘광우병’사태의 재현 가능성 말이다. 이제는 한국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 1위국이라니 당시 얼마나 거짓에 휘둘렸다는 건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고주파 레이더의 안정성 논란도 비슷한 궤적을 따르는 모양새다.
진짜 의아한 점은 다른 데 있다. 중국의 터무니없는 반발이다. 분명 중국의 군사적 종심(縱深)에는 닿지도 않는 레이더이고 방어용일 뿐인데 왜 이리 난리를 칠까? 그렇다고 중국이 북핵 해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한국이 ‘만만’해서인가? 아니면 국내 여론을 분열시키기 위한 고도의 공산당 전략인가?
여기엔 절박한 진짜 이유가 있다. 국가안보의 핵심은 언제나 1%의 개연성을 다룬다. 그 여지조차 없애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는 거다. 효용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타당할 수 없는 선택이 안보영역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안보론의 시각에서 중국식 거친 불만의 근본적 이유는 유사시 중국 전략무기의 무력화 가능성 때문이다.
만에 하나, 어떤 이유에서건 남북의 무력충돌이 국지전 수준을 넘어 지상과 바다에서 미군의 대거 투입으로까지 전개될 때 중국의 미사일은 어디를 향할까? 중국이 관영언론을 통해 양측의 자제만 촉구하며 한국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로만 ‘호소’할까? 아니면 북한을 벌(罰) 주기 위해 북한의 전략적 요충지를 향해 미사일을 쏠까?
현대전에서는 미사일의 위력이 곧 전투력의 성패를 가늠한다. 지상전은 최후 수단이다. 과거처럼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진격할 가능성은 낮다. 미사일 몇 발로도 전쟁 의지는 꺾인다. 미사일은 군사적으로 의미 없는 대도시의 고층빌딩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전략적 군사시설을 정확한 타깃으로 한다. 중국 미사일의 목표지는 남한의 ‘그곳들’이다.
어차피 한국의 군사력으로는 중국을 직접 타격할 수 없음은 서로가 아는 사실. 그런데 남한 내 ‘사드’의 출현은 중국 전략무기의 기동범위를 현저히 좁힌다.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거점은 일본과 남한일 수밖에 없는데 이곳을 목표로 삼은 중국 미사일의 무력화(無力化)라니 중국으로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중국의 입장만을 ‘배려’한다면 ‘사드’를 들여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중국을 잘 구슬려서(?) 북한의 도발을 잠재우겠다는 작전을 대중은 더 환영했을 거다. 미국과 중국에 끼인 한국으로선 그것이 최선이라고 미국에게도 ‘읍소’할 수 있다. 미국이 굳이 남한에 ‘사드’ 아니면 안 된다고 막무가내였을 리도 없다.
핵심은 바로 이거다. 대통령은 ‘결단’했다. 이것이 동북아 정세를 읽는 단서가 된다. ‘사드’의 대중국 영향력은 사실상 부차적이다. 배치 의도가 중국을 1차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 미사일 방어가 1차 목적인 게 맞다. 다만, 유사시 남한으로 날라올 중국 미사일까지 방어할 능력을 갖추었기에 중국과 러시아는 극렬 반대할 뿐이다.
‘사드’를 받기로 한 대통령의 ‘결단’에는 남북의 무력충돌, 나아가 선제적 타격도 감수한다는 결의가 담겼다. 남북 간 정국이 어떻게 흐르던 북한의 도발을 분쇄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을 유보하지 않겠다는 최후의 의지가 담긴 결단이란 것이 ‘사드’ 논쟁의 핵심 메시지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여기엔 국가존립에 관한 그 체제의 정치철학적인 의미가 담겼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반대의견도 존중 받는다. 그러나 국가안위에 관한 한 통치자의 결단은 곧 국가의지의 문제가 된다. 헌법은 그것의 운용원리와 절차를 제도화한 것이자 정당성의 최후 보루이기도 하다. 2008년 광우병 사태와 2016년 ‘사드’사건이 다르게 취급돼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핵탄두를 얹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미사일(ICBM)을 전략 핵무기라고 부른다. 중국이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쏠 리 없다. 한국을 향해서도 핵무기는 쓰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에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유지되고 있는 까닭이다. ‘사드’는 이 세력균형의 한 축을 무너뜨리는 잠재적 효과가 있다. 뜬금없어 뵈는 러시아의 반발도 그 반영이다.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반도는 동북아 ‘열강’(용어 자체가 제국주의 시대의 부산물로 보이나 여전히 유효한 단어다.)이 맞붙은 팽팽한 세력균형의 틈바구니를 벗어날 수 없는 준엄한 현실에 놓여있다. ‘사드’는 러시아와 중국의 안보적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었다. ‘겨울잠에 빠져있던 곰’ 같던 러시아마저 깨웠으니 말이다.
[러시아-중국-북한] 對 [한국-일본-미국]의 대립형 구도가 반드시 냉전의 재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냉전적 요인을 벗어나기 힘든 지정학적 특수성이라고 읽어야 현실 설명력이 높아진다. 현실을 부인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죽하면 한국은 ‘고래 등에 낀 새우’가 아니라 독자적 영역이 있는 ‘돌고래’라는 비유까지 나왔겠는가!
영토라는 주권적 사항을 우리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이웃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이것은 중국이냐, 미국이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든, 미국이든 한국의 생존전략에 따라 개별적으로 ‘선택’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럴 땐 통치자의 결단에 집결해주는 내적 동력만이 정답인데 현실은 암담하다.
과연 온갖 전략물자의 정확한 위치와 성능까지 공개하며 설득하는 일이 불가결한 건지 안보전략가들의 한숨은 깊어질 것이다. 적어도 체제의 내적 동원력과 응집력만큼은 북한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이 문제만큼은 정치체제 작동방식의 효율성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항구적인 전시동원 체제에서 살아야 하는 개인은 그 체제의 테두리를 뛰어넘거나 앞설 수 없다. 북한의 현주소다. 반면 한국처럼 정치체제의 통치철학적 결단이 마땅히 받아야할 만큼의 존중도 부재한 사회가 떠안아야 하는 체제 내적 부담감도 실로 크다. 이래나 저래나 개인은 이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사는가 보다.
개인이 느끼는 무기력감의 근저에는 이런 사회적 운명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이다. 망하든 흥하든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이만큼 사는 것이 기적(奇跡)같단 생각이 부쩍 많아지는 세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