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논란이 보여준 동북아 국제관계의 맨 얼굴

이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면 미국인들보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알 것 같다. ‘사드’의 작동원리에서부터 한반도 배치에 반대하는 논리까지 고도의 군사 안보전략적 사항에 대해 척척 답변할 수준이니 말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답해 보자. ‘사드’는 한반도에 필요한가? ‘사드’를 남한 내 배치하면 북한 핵을 막을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은 같은 것 같지만 각기 다른 답을 갖고 있는 각각의 문제제기다.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데서 ‘사드’논쟁이 과잉 생산된다.
 
무엇이 다른가? 첫 번째 질문은 동북아 안보균형의 차원에서 ‘사드’를 조명해야 한다. 이유와 목적에 따라 답안의 논리가 바뀐다. 두 번째 질문은 당장 북핵이라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지 ‘사드’의 능력을 묻는다.
 
국가안보는 곧 생존의 문제가 전부인 것 같지만 본질은 어떤 삶과 국가의 존립을 추구하냐는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철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과 국가에 대한 인식론과 세계관에 따라 안보를 이해하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이어온 우방(友邦)과 주적(主敵)의 역사는 현재와 가까운 미래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간단히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부박하고 불안정한 현실에 매몰된 세력이 득세할 수록 안보문제도 마치 장사치의 흥정인 양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값싼 속물적 논쟁 끝에 ‘사드’가 놓여 있다.
 
한국 내 ‘사드’ 배치가 기술적으로는 남한을 향해 날아오는 북한 핵 미사일을 막기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사실의 차원이다. 비용 대비 효과라는 비용효용이론을 따른다면 차라리 핵무장을 하는 것이 북핵 억지에 훨씬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사드’자체가 북한의 핵 미사일 방어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못 되는 걸 알면서도 중국의 극렬한 반대에 맞서 추진하고 있는 것인가? ‘사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부는 첫 번째 질문에 전략적 중심을 두고 ‘사드’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이 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북한 핵 문제가 남북간 이슈차원을 넘어섰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북핵 위협의 현실적 절박성을 충분히 인지한 고육지책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일각의 주장처럼 국내정치용이라는 폄훼는 무지의 소산일 뿐 아니라 좁디 좁은 식견의 소치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중국의 반발은 이를 방증한다. 중국은 한국을 미국의 전위대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국을 향해 날리는 온갖 ‘겁박’을 동북아 최전선에 위치한 한국에 쏟아붓고 있다. 그것도 중국 공산당 나팔수들인 관영언론을 통한 쓰리-쿠션(three-cushion)방식으로 말이다.
 
솔직히 남한 내 ‘사드’ 배치는 미국을 위한 배려차원이 크다. 미국을 향해 날아갈지도 모를 핵 미사일에 대한 제1 저지선 역할이다. 이 부담을 남한이 맡는 것이 과하다고 보는 걸까?
 
한미동맹의 실체는 양자 간 군사동맹 관계다. 동맹국이 처할지도 모를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그간의 신세로만 따져도 한국이 미국에 진 빚이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북한의 군사적 혈맹이다. 북한은 중국의 딜레마이자 미군의 서진(西進)을 막아주는 자산이라는 이율배반적 존재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분할 수 없는 한결같은 ‘사드’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꿀 먹은 벙어리’인양 가만히 있는 것은 홍보역량의 부족이라기 보다 일종의 정보 비대칭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첫 번째 질문을 택한 숨은 의도와 목적을 밝힐 수는 없다.
 
섣부른 해명과 설득은 안보와 직결된 전략을 공개하는 것과 같다. 안보관이란 곧 국가의 생존을 위한 기능론적 목적과 생존방식을 결정짓는 실존적 성찰이 뒤얽힌 거대한 담론의 영역이면서 모든 걸 공개하거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투명한 세계는 아니다.
 
고도의 정보를 가진 의사결정자만이 고뇌의 벼랑 끝을 걸어가야 하는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점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성숙한 것이다. 최고 정책결정자는 이런 임무를 수행토록 전결위임을 받은 것이지 사회구성원에게 일일이 설명하라는 개별숙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사드’배치로 한국이 미중 갈등의 첨예한 각축장이 될 것이란 우려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군사적 속국이냐는 비아냥은 도덕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주변 강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왔던 적은 단 한 때도 없었다.
 
국내의 갖가지 여론과 무관하게 ‘사드’의 향배는 이제 미국과 중국의 타협에 달렸다. 이미 중국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적극적 대북 제재에 마지못해 나선 모양새다. 그만큼 ‘사드’ 논란은 중국의 허를 찔렀다.
 
이웃국가를 이토록 비도덕적이고 편향적으로 모욕하는 중국의 자세는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의 절정이며 ‘중화’의 본질이다. 중국이 보여주는 극도의 오만함에는 침묵하며 ‘사드’ 비효용론을 들어 미국만을 비난하는 주장에는 일방적 중국 중시론이 깔려있다.
 
표면적 이유는 중국발 경제태풍이 한국을 덮치지 않겠냐는 염려라고 하지만 실상은 오래 묵은 사대주의의 흔적이자 5천년을 이어온 중화의 현대적 잔재다. 그 저변에 깔린 것은 중국에 대한 진짜 두려움인가, 공포에 적응된 생존을 위한 비열함인가.
 
상처는 흔적을 남기는 법. 중국에 경도돼 버린 지적이면서 감성적인 정향성(orientation)은 어쩌면 한반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남겨진 민족적 상처의 독특한 흔적이라고 해석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보문제에 있어서는 국가의 위신과 민족의 자존이라는 무형의 가치가 대외정책 방향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수임을 일반인들도 깨달아야 할 때가 됐다. 중국의 끝을 알 수 없는 무례한 언론보도는 이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중국의 안보정책과 대외전략은 독립변수로 두고, 미국의 태평양 전략은 수정돼야 할 종속변수로 보는 중국 편향성은 언제까지 용납돼야 할까? 중국은 ‘절대선’이라는 사대근성을 벗어나야 ‘사드’ 논쟁의 본질이 보인다.
 
북한 핵이 ‘사드’를 불러 왔고, ‘사드 배치’는 중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그것이 다시 대북 영향력으로 돌아오고 있다. 동북아 국제정치 속에서 판돈을 키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북한이다. 한국도 어쩔 수 없이 편승하고 말았다. 누구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카지노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과 같다.
 
남북 간 대화의 다리는 끊겼지만 누가 한국의 진짜 친구가 될 것인지는 명확해졌다. 믿었던(?) 남한마저 공을 북한에게 넘기고 말았다. 북한이 한국을 향해 먼저 손 흔들지 않는 이상 아무도 북한을 향해 손 내밀지 않을 형국이다. 누군가는 사라져야 끝이 나는 죽음의 레이스가 한반도에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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