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망산 불도가니…시신조차 보내주지 않아

교화소 생활은 나에게 많은 고통과 가슴 아픈 추억들을 남겨 놓았다. 벌목반 배치 받은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다들 일어나서 무릎 꿇고 앉아서 사 선생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영훈이가 그냥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무심결에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는데 반쯤 몸을 일으키던 그가 털썩하고 쓰러졌다. 속으로는 약간 놀랐지만, 설마 하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영훈아!”

모두 영훈이를 부르며 비통해 하였지만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영훈이 얼굴만 내려 보았다.

아침식사를 할 때에도 영훈이의 시체는 우리 곁에 있었다. 벌목반장은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영훈이의 사망을 담당 선생에게 보고했다. 영훈이 몫의 밥을 다른 허약자에게 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영훈이는 배가 고파서 부대를 탈영한 군인으로 교화 2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곳에 들어온 지 4개월 만에 죽었다.

입소되던 당시에도 허약 1도였던 그가 힘든 교화 생활을 이겨낼 리 만무했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귀여운 누이동생을 남겨둔 채 교화소 감방에서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영웅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던 꿈도, 노동당원이 되어 부모님들 앞에 당당히 서겠다던 희망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훈이는 전거리 교화소의 불망산에서 한 줌의 재로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림일철, 강동섭, 김용남, 박상철 등 여러 사람이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노동재해로 죽거나 대부분은 허약병 때문에 숨졌다.

당시 전거리 교화소에서는 한 달에 평균 30~40구의 시체를 불망산이라고 하는 산에 있는 큰 화로에 넣어 불태워 버렸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 굴에 가서 죽는다는데 하물며 사람들의 죽은 시신조차 고향에 보내주지 않았다.

사망 통지서를 받고 달려온 부모형제들의 통곡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불망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면서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표현 못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가는 그들을 배웅했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들에게 “학습을 잘하자!” “죄를 씻기 위해서 일하자!” 이 말 외에는 다른 말을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만약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감시하던 사람까지 같이 벌을 주었다.

그리고 말을 잘못하면, 예를 들어 어떠한 정치적 발언이나 사회를 비난하는 말, 불만이 섞인 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에 모두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울 수도, 죽은 자들을 위로 할 수도 없었다. 참으로 비극이다.

부자 간에 함께 교화소에 들어왔는데 그만 아버지가 석 달 만에 허약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망산으로 가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던 아들의 심정이 오죽했겠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형, 자기 동생, 자기 아버지를 불망산 불도가니로 보내면서 한마디 추모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면회를 왔다가 아들이 사망하였다는 소리에 땅을 치며 통곡하는 가족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목격할 때면, 나는 속으로 ‘만일 내가 죽는다면 우리 어머니도 꼭 저들 같은 아픔을 당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살아서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리라 굳은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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