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6·25 전쟁영웅’이 쥐굴 털고 살아가는 사연

▲북한군 화보. 자료사진

탈북자들은 ‘36호의 보고’라는 북한영화를 잘 알고 있다. 북한이 1970년대 만든 영화로 6∙25전쟁 당시 36호라는 공작명(대호)을 가진 북한 공작원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영화는 이 공작원의 영웅적인 첩보활동으로 북한 내에 제2전선을 형성하려던 남한 특공부대가 전멸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6∙25전쟁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실존인물은 의용군 출신 이백겸이다.

지금도 북한 보위부(정보 당국) 도서실 비디오 보관소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 이백겸’이라고 씌워진 이백겸의 실화(다큐멘터리) 테이프가 있다.

이백겸의 고향은 강화도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그의 나이는 22살 정도였다. 당시 남로당 당원이었던 이백겸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반동분자(국군 협력자) 색출에 앞장섰다.

그는 인민군이 강화도와 인천일대에서 수많은 소위 ‘반동’들을 색출하고 재판,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어린 나이에 강화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남침 당시 북한은 남로당 및 지식인, 부역자들을 통해 지도 소조를 꾸렸으며 이들이 각 인민위원회 요직을 차지했다)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인천상륙이 시작되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이백겸은 의용군으로 편입, 후퇴대열을 따라 나섰다. 학교시절 대학 공부까지 했던 이백겸은 인민군에서 통신 병과 무전수로 근무했다.

강화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이은 인민군 무전수. 이 경력들은 그에게 무훈의 영광을 안겨 줬지만 그가 평생 한직을 맴돌게 된 원죄가 되기도 한다.

국군의 2전선을 궤멸시킨 공로자

영화에서는 1951년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되면서 남북이 서로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작전을 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북한이 남한 내 빨치산 활동을 통해 남한의 후방을 교란시켰던 것처럼, 남한 역시 북한에 특수부대들을 잠입시켜 후방을 교란시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본 이백겸의 수기에 의하면 그의 활약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기에 따르면, 당시 국군은 황해도와 강원도 방면을 담당한 1지대, 평양주변을 담당한 2지대, 함경남도 함흥방면을 담당한 3지대와 함경남도 갑산 백암일대를 담당한 4지대로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남한은 1951년 여름 제 3지대 검열관과 제 4지대에 파견되는 무전수를 포함한 4명의 특수부대원을 함흥시 주변 바다로 침투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북한 자위대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북한은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가짜 검열관과 무전수를 특수부대 본대에 잠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때 북한이 잠입시킨 가짜 무전수가 바로 이백겸이었다.

북한이 잠입시킨 가짜 검열관에 의해 함흥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제 3지대는 전멸하였다. 이백겸이 무전수로 잠입한 4지대도 며칠 못 가 어느 한 동굴에 집합하였다가 북한군에 의해 전원 체포되고 말았다.

갑산일대에 투하된 4지대는 40여 명 인원으로 갑산 단천 일대 수림 속에 은거해 있으면서, 북한의 주요기관들과 인민군 보급로를 습격 파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북한은 4지대 특수부대를 체포한 후에도 이백겸에게 부대가 활발한 활동을 벌리는 것처럼 위장한 허위전파를 계속 날리도록 하였다. 허위전파를 받은 남한 군은 갑산일대에 수 차례에 거쳐 비행기로 대규모 지원물자들을 투입해 주었다.

특히 그는 1951년 말 양강도 백암일대로 옮겨가 그곳에 있던 남측 소부대(12명의 인원)에 잠입해 이후 활동을 위해 인원을 보충해 달라는 전문을 보냈다. 결국 이백겸에게 속은 소부대원들과 새로 보충된 수십 명의 특공대원들은 침투지점에서 인민군에 의해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북한영화 ‘36호 보고’도 마지막에 공중에서 낙하한 특공대원들이 모두 체포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처럼 전쟁기간 이백겸에 의해 체포된 남한 특수부대 인원은 1백여 명에 이른다.

전후, 탈출 기획한 국군포로들 체포해

이백겸의 활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서 이백겸은 북한 보위부의 임무를 받고 당시 국군 포로들이 억류되었던 김책제철소에 잠입했다. 북한은 송환하지 않은 국군포로들을 1956년까지 김책제철소에 억류시켰다.

그는 국군포로들 속에 잠입하여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포로들 속에서 반란분자들을 색출하는 활동을 하였다. 1955년 이백겸은 집단 탈출을 준비 중이던 국군포로 120여명을 적발하여 북한 당국에 신고, 처형되게 만들었다.

이후 1956년 국군포로들이 북한의 광산과 탄광들로 분산되자 그는 국군포로들 속에 끼여 함경북도 김책시에 있는 성진제강소에 잠입했다. 이때에도 공장 내 청년들로 조직된 반정부 조직원 30여명을 색출해 내는 공로를 세웠다.

1960년 이백겸은 높은 공로가 인정되어 30대의 젊은 나이에 양강도 보위부 반탐과 과장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공로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대 말 남로당 당원들에 대한 숙청사업이 진행되면서 이백겸도 결국에는 보위부에서 밀려나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제적인 지식과 실무 경험이 없었던 그는 1970년대 초에는 양강도 인민위원회 과장, 지도원으로 거듭 좌천됐다.

결국 이백겸은 1990년대 초 양강도 인민위원회 지도원이라는 형식적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60살 나이가 되어 “공로 보장”이라는 형식으로 퇴역했다. 수백 명의 간첩, 반동분자들을 잡았으면 공화국 영웅은 따논 당상인데도 북한은 그에게 훈장 몇 개만 수여하는데 그쳤다.

양강도당이 2차례에 거쳐 ‘조국통일상’ 수상자로 추천하여 문건을 올렸으나 남로당 출신이라는 거부감 때문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고난의 행군시기 다람쥐 굴 털고 살아”

퇴역 이후 그는 국가에서 준 배려아파트(특별한 공노자들에게 주는 아파트 살림집, 혜산시 혜명동 양강도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음)에서 살 수 있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딸은 교원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아들은 대학에도 보내지 못했다.

아무리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공로자라 해도 남로당 자식들은 출세나 결혼에 제한이 있다. 행정기관 간부로 등용될 수 있지만 당이나 법계, 보위부와 같은 핵심 권력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아버지가 남로당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아들, 딸은 평범한 노동자들과 결혼할 수 밖에 없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은 전쟁노병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국가에서 특별히 공급해주는 식량과 4호 공급(간부나 국가유공자에게 주는 기름, 담배, 육류, 간식 등)이 끊기자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견딜 수 없었다.

이백겸의 경우는 자식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아들은 하루가 멀다고 보안서 구류장에 들어 않는 좀도둑이었다.

결국 이백겸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서 준 아파트를 팔아버리고 혜산시 연봉동의 초라한 집으로 이사했다. 그나마 아파트라도 팔았기에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을철에 이백겸은 가까운 전쟁노병들과 함께 연봉산 주변 밭들의 돌담들을 허물어 다람쥐나 쥐굴들을 털어 살았다. 보통 다람쥐나 쥐굴 한개를 털면 겨울나기 용으로 저장한 도토리나 개암, 쌀 10kg정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한때 혜산시에서 전쟁노병들이 쥐굴을 털며 산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도당간부들이 나서 쌀을 지원하는 대책회의까지 열렸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뿐이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지금도 이백겸은 혜산시 연봉동의 허술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80이 다 된 나이에도 연봉산에 밭을 일구어 힘들게 농사지어 연명하고 있다. 2002년부터 전쟁노병들에 대해 배급을 조금씩 주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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