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군인도 동독처럼 통일 앞두면…”

[조선 인터뷰]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 라이너 에펠만

“내가 마지막 국방장관을 맡았을 당시 동독 군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들의 장래였다. 앞으로 내 개인의 삶은 어떻게 될까라는. 아마 북한 군인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군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니까 자신의 신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할 것이다.”

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을 지낸 라이너 에펠만(Rainer Eppelmann·64) 박사를 만났다. 독일 통일 과정 세미나를 위해 방한한 그는 한때 동독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온 인물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였던 1990년 동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총선거가 있고서 그는 동독의 국방장관직을 맡게 됐다.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동독 군대를 관리하고 해체했던 것이다.

―북한은 100만 병력에 ‘선군(先軍:군대 우선)정치’를 표방하고 있다. 국방장관을 지냈던 1990년 당시 동독 군부의 파워는 어떠했나.

“동독 군대는 숫자로도 지금 북한보다 훨씬 적고, 정치적 비중도 낮았다. 군대는 당(黨)을 위해 존재하는, 당의 창과 방패 역할을 하는 기구였다. 그런 역할의 한계가 있었다. 북한처럼 군대가 모든 것에 우선인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군부가 집단 반발했다면 동·서독의 앞날은 어떻게 됐을까?

“통일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든다. 군인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쿠데타의 움직임을 보였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어떤 민주화 시위도 군에 의해 무력 진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독 군대는 당(黨)을 위한, 당을 지원하는 조력자에 머물러야 한다고 스스로 한계선을 긋고 있었다. 자신을 사태 해결의 전면에 나설 정치가로 자처하지 않았다.”

―실제 군부가 들고 일어나는, 쿠데타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는가.

“먹을 것을 더 달라든지 군인들을 탄광이나 공장에서 일을 시키지 말라는 등 의식주 시위는 있었다. 또 전차부대의 장교들이 베를린으로 전차를 끌고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쿠데타 시도가 아니라 좀 더 나은 군의 복지 후생을 요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됐다.”

―북한 군대도 이처럼 의식주와 관련된 시위를 벌일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북한 체제는 꽉 짜여 있어 북한 군대가 특별한 요구사항을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도처에 그런 폭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고 본다. 이전 김일성 시절에는 군이 확실하게 장악된 인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그는 구동독 시절 군복무를 거부해 8개월간 투옥된 전력이 있다. 민간인 출신으로서는 유일한 국방장관이기도 하다.

“나는 기독교인(현재 목사 신분)이었고, 과거 아우슈비츠(유대인 수용소)의 기억 때문에 무기를 들고 싶지 않았다. 마침 1964년 동독은 양심과 종교적 이유로 무기를 거부할 수 있는 쪽으로 법이 개정됐다. 문제는 무기는 거부할 수 있지만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조항은 삭제되지 않았다.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했던 나는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선서를 거부해 수감생활을 했다. 그 뒤 길을 닦거나 병원을 짓는 건설병으로 18개월 복무했다. 1990년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마지막 동독 총리)가 ‘국방장관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국방장관은 안 하겠다. 그러나 군축 및 국방장관이면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 정확한 직책은 ‘군축 및 국방부’ 장관이었다. 나는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이었는데도 동독 군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단 한 건의 무력(武力)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목사 출신으로 統獨때 軍해체 지휘

“동독 대다수가 서독처럼 살기 원해 군부도 동요나 통일반대 없었다”

―통일을 목전에 두고 동독 군대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나?

“군의 동요가 있었으나 대부분 개인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물론 변화는 동독 군대에 불편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되돌아가는 쪽은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구소련에서 개혁·개방 움직임이 나타난 뒤로 동독의 일부 군 장성 및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도 ‘동독이 이대로는 못 간다’ ‘뭔가 변해야 살아 남는다’는 생각이 형성되고 있었다.”

―동독 군부의 수뇌부는 과연 통일을 원했나?

“군부가 나서서 통일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독 내 민주적인 발전 흐름에 대해 대체로 긍정하는 쪽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것처럼 동독 군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통일 논의는 상당히 나중에 나온 얘기다. 통일은 1990년 7월 콜 서독 총리와 고르바초프 구소련 서기장이 만났을 때에야 그 윤곽이 잡혔던 것이다(독일 통일은 1990년 10월 3일). 심지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도(1989년 11월 9일) 이를 곧바로 통일과 연결짓지는 않았다. 통일은 갑자기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이뤄진 것이었다.”

―통일 직후 동독 군 수뇌부들은 어떻게 됐나?

“장군들은 원칙적으로 모두 옷을 벗었다. 이들에게는 동독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연금은 주어졌다. 일부는 통일된 뒤 1~2년간 민간인 신분으로 동독 군대 해체작업을 위한 고문 역할을 맡았다. 동독 장교의 경우 모두 2만2000명 중 약 절반이 통일 후 연방군에 편입될 수 있었다.”

―동독 군부는 이런 자신의 운명을 예측했을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할 것을 설득했다. 전력(前歷)을 심사해 하자가 없는 경우에는 연방군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국가안전부(슈타지)에 협력한 적이 있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데 돕겠다고 했다. 동독의 고위 장교들 중에는 구소련에서 공부를 하고, 그쪽 네트워크를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구소련과 사업을 하는 서독 기업들에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남북한의 통일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어려운 질문이다. 독일 통일의 경험으로만 말하겠다.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동독이 지속적으로 경제가 어려웠고’, ‘서독과 비교해 너무 많이 뒤처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동독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동독 주민들은 서독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고 있었고 그들처럼 살고 싶어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과 회담을 하거나 접촉할 때 동독 사람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서독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항상 신경썼다. 이게 핵심이었다.”

[조선일보]
인터뷰=최보식 기획취재부장 / 정리=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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