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韓-蘇수교시 핵개발 위협”

북한은 지난 1990년 9월30일 역사적인 한국-소련 수교를 앞두기 직전, 소련 정부에 대해 수교가 이뤄질 경우 핵무기 개발을 비롯해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한반도 분단 책임 추궁, 북방영토에 대한 일본측 지지로 선회 등 각종 위협을 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가 30일 한-러수교 15주년을 앞두고 발굴한 알렉산드르 카프토 전 북한 주재 소련 대사(재임 기간 1991.1~1992.3) 회고록(2003년 출간)에 따르면 1990년 9월2일 한-소 수교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이후 그루지야 대통령 역임)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김영남 외교부장으로부터 수교에 대한 북한의 위협들이 담긴 문서를 전달받았다.

그동안 북한 당국이 한-소 수교에 반대해 소련 지도부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점은 알려졌지만 상세한 정황이 나타난 것은 카프토의 회고록이 처음이다.

카프토는 한-소 수교 후 첫 북한 대사로 발령을 받아 평양으로 떠나기 직전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을 두차례 만났고 그로부터 한-소 수교 정황과 이로 인해 초래된 소련-북한간 최악의 갈등사태를 잘 봉합하라는 특명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카프토는 1988년 6월 고르바초프의 개인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당시 미-소 정상회담 결과를 김일성 주석에게 설명하는 등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며 북한 대사로 나가기 직전 쿠바 대사와 공산당 이념분과위원장을 지내는 등 역대 북한 대사로는 최고 거물급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삶의 교차로에서’라는 제목의 그의 회고록은 공산당 간부와 대사로서 활동상을 담고 있으며 한국 관련 부분은 ‘주체의 나라에서’라는 장에서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과의 만남, 고르바초프의 제주도 방문 에피소드, 대(對)한반도 비밀보고서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기술돼 있다.

◇ 北, 셰바르드나제 냉대 =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하 직위 생략)은 평양 부임을 앞둔 카프토를 만나 현재 북한 만큼 소련과 첨예한 갈등관계에 있는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카프토는 회고록에서 셰바르드나제를 만난 정확한 날짜는 적지 않았으며 셰바르드나제의 말을 듣고 북한 대사로서 자신의 앞길이 험난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셰바르드나제는 한-소 수교를 앞두고 김일성과 상의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지만 이미 소련 정권은 한국과의 수교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방북한 셰바르드나제를 만나주지 않았고 김영남은 김일성과 뭔가 논의를 하기 위해 셰바르드나제 곁을 자주 떠났다.

김일성 면담이 거부되자 셰바르드나제는 평양에서의 모욕은 자기 외교관 경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주북(駐北) 대사를 대신 시켜 수교 사실을 통보하는 게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영남은 셰바르드나제의 방문 둘째날(9월3일), 회담장에서 한-소 수교에 대한 북한측 비난성명을 낭독했고 이 문건을 셰바르드나제에게 전달했다.

셰바르드나제는 모욕감을 느껴 다음날(9월4일) 일본으로 출국했으며 곧장 일본 황실로 달려가 김일성 보란 듯이 천황을 알현했다.

◇ 북, 핵무기 개발추진 등 격분 = 북한이 셰바르드나제에게 전달한 비난 성명에는 소련이 북한과 맺은 약속을 위반했다는 것과 이에 따른 북한의 강력한 대응 방침이 담겨져 있었다.

북한은 먼저 한-소 수교가 소련의 약속 위반이라는 증거로서 몇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고르바초프가 1986년 10월 양국 고위급회담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바꾸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셰바르드나제도 같은해 12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 정치외교 관계를 맺을 의향이 없음은 확고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특히 북한의 의심을 떨치기 위해 공동성명에다 ‘소련은 한국을 승인하거나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문구를 집어넣기도 했다.

북한은 한-소 수교로 인해 1961년 7월 체결한 ‘조소(朝蘇)상호원조조약’ 제3조, 즉 모든 국제문제에서 양국은 협의한다는 규정을 소련측이 위반한 만큼 협정은 파기된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그 근거로서 1988년 9월 고르바초프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북한과 전혀 상의없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입장 변경을 선언했으며 1990년 6월 한-소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협정 파기로 인해 자력의 길을 찾아야 하는 만큼 핵무기 개발과 함께 지난 1985년 가입한 NPT에서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 이유가 한국에 이미 미국 핵무기가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한반도에는 핵무기 경쟁으로 긴장이 감돌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은 특히 소련의 수교행위는 북한을 격리하고 약화시키려는 미국과 한국의 음모에 소련이 영합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북한은 또 38선 획정에 따른 남북 분단 책임을 소련도 미국과 함께 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소련이 동맹관계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기 때문에 소연방에서 독립하려는 공화국들을 승인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나설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를 위해 북방 영토 분쟁에서 일본측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은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동독이 서독에 흡수됐지만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바람대로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 김일성, 고르바초프 이름 안불러 = 카프토는 1991년 1월1일 정식 대사 부임을 앞두고 그전에 평양으로 출발했다.

고르바초프는 카프토에게 김일성에게 전하라면서 특별서한을 줬는데 카프토는 이는 이례적인 일로 양국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편지에는 북한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대화에 나서는 등 김일성에 대한 칭송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카프토는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을 만날 것을 학수고대했지만 신임장 제정식에는 김일성 대신에 부주석이 나왔으며 당시 평양 외교단과 기자들은 북-소 관계가 아주 컴컴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후 김일성은 가끔 카프토를 불러 만났는데 그를 제외한 소련 대사관 직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회동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예컨대 카프토한테 장소나 시간은 언급하지 않은 채 초청한다는 연락이 오고 그가 특정 장소에 나가 있으면 보안대원들이 메르세데스 차량을 몰고 나타났다.

카프토는 김일성과 단독으로 만날 때는 항상 수시간을 달려 평양을 벗어났고 김일성은 면담시 양국간 민감한 문제는 꺼내지 않았으며 특히 고르바초프 이름은 단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카프토는 특히 고르바초프가 김일성에게 편지도 보냈지만 실제 소수 측근들에게는 김일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했다.

◇ 蘇, 한반도 비밀보고서 작성 = 1991년 1월3일 소련 외무부, 국방부, 국가보안위원회(KGB)는 한반도 정세와 소련의 대응을 담은 비밀보고서를 고르바초프에게 올렸다.

고르바초프는 4월2일 이 보고서에 서명했으며 카프토는 평양에서 보고서를 받아봤는데 한국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문건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한반도에서 분쟁을 막기 위해 다국간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며 미국측에 한반도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적 균형 유지와 남북한에 군사기술 지원 축소 등의 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의를 담고 있다.

또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철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 문제를 부각시킬 필요가 없다는 등 다소 혼선을 빚고 있다.

카프토는 개인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이 군비 증강에 나서게 되고 미국이 한국에 대해 핵무기 등을 동원한 안보우산을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에는 또 블라디보스토크와 부산에 상호 영사관을 개설하는 문제,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소련제 무기들을 한국에 판매하는 문제, 소련의 과학기술을 한국에서 산업화하는 방안 등 한국과의 적극적인 교류 추진 내용도 포함돼 있다.

◇ 갑작스런 고르비 제주도 방문 = 소련은 한국과 수교 후에 남북한을 최대한 동등하게 대우하고자 상당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이를 깨버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바로 1991년 4월 고르바초프의 제주도 방문이었다.

당시 소련 외무부 내에서는 고르바초프의 도쿄 방문을 앞두고 몇가지 방안이 첨예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첫째는 도쿄 방문 후 서울을 들르는 것, 둘째는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하는 것, 셋째 방안은 도쿄에만 가는 것이었다.

주북 대사였던 카프토는 소련 외무부에 출석해 평양과 서울을 동시 방문하거나 도쿄에만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당시 외교 전문가들도 평양을 빼고 서울에만 갈 경우 북한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는 내심 평양은 가기 싫어했고 서울에만 가고 싶어했지만 도쿄 외에 어디에도 들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론났다.

카프토는 평양에 돌아와 외교단과 기자들에게 고르바초프가 도쿄에만 가기로 결정했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도쿄에 있는 동안 북한 주재 팔레스타인 대사는 카프토에게 달려와 서방 소식통에게서 고르바초프가 한국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카프토는 이를 무시했지만 2시간이 지나자 주북 알제리 대사도 찾아와 자기가 아는 북한 외무부 소식통이 고르바초프의 한국 방문 소식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고르바초프가 서울에 올 줄 알았지만 그는 제주도에 모습을 드러냈고 국빈 방문이 아니기 때문에 수도가 아닌 섬에 오게 됐다는 설명이 나왔다.

고르바초프는 이 같은 방식을 통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노태우 대통령의 열망을 만족시켜줬지만 카프토는 허위 정보를 흘렸다는 창피함 때문에 2주동안 북한 주재 외교단 모임에 나갈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모스크바=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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