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이 한반도 주요 이슈에 관해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채 알맹이 없이 끝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회담을 통해 한미 간에 북핵 해법부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방위비 분담금, 한미FTA 재협상 등 민감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는 게 재확인됐지만, 정작 공동성명 등을 통해 발표한 내용은 선언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통상 정상회담 전 양국 당국이 주요 이슈에 관한 사전 조율을 거친다는 점에서, 대북정책이나 사드, 방위비 분담금, 한미FTA 재협상 등 논의에 있어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을 약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요 사안들은 향후 실무진들끼리 조율해갈 여지를 남겨둔 채, 이번 정상회담에선 양국 정상 간 우의와 신뢰를 다지는 데 무게를 두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회담 자체는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됐으나, 여전히 한미 간 주요 의제에 있어선 명확한 접점을 찾지 못한 만큼 향후에 있을 실무적 조율이 민감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양국 정상이 일부 사안들에 대해 분명한 입장 표명을 미루면서, 이후 대북정책이나 대한·대미 정책을 구체화하는 데 예상치 못한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북핵부터 한미FTA까지 ‘알맹이’ 없는 합의로 끝나…향후 한미 간 불협화음 낼 가능성”
우선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 외에도 대화의 문을 열어두겠다는 데 합의를 했지만, 대화의 조건이나 수위에 있어선 시각 차가 뚜렷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미 길에 올라서도 북핵 동결에서 시작해 북핵 폐기로 이어지는 ‘2단계 접근법’을 강조했던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후 언론발표문에서 “북한과의 전략적 인내 시대는 실패했다”고 못 박았다. 양국 정상 모두 대화 가능성은 염두에 두되, 제재와 대화 중 어느 부분에 더욱 무게 중심을 둘지 명확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셈이다.
남광규 매봉통일연구소장은 1일 데일리NK에 “양국 정상이 별다른 공통 의견 없이 각자의 입장을 밝힌 데 지나지 않는다”면서 “북핵에 대한 위협 인식은 공유하고 있지만, 북핵 해법에 있어서 문 대통령은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을, 트럼프 대통령은 (제재와 압박 위주의) 강경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비핵화 방안에 대한 이견 차가 더 뚜렷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송대성 전(前) 세종연구소장도 “한국은 북한과의 대화나 단계적·포괄적 방안에 중점을 두는 반면, 미국은 제재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양국 간 비핵화 방안에 있어 엇박자가 날 수 있다”면서 “최근에는 중국까지도 미국의 대북제재에 일사분란하게 동참하려는 모습인데, 여기서 한국이 대화니 단계적 방안이니 하는 말만 하면 제재 국면을 이완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국 정상이 사드 배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던 데 대해서도 아쉬운 목소리가 나온다. 문 대통령이 회담 전 미 의회 지도부 간담회 등을 통해 사드 배치에 대한 미 조야의 우려와 불신을 해소하는 데 주력하긴 했지만, 숱한 논란을 불러왔던 사드 문제를 정상회담에서도 다룸으로써 이후의 우려를 확실히 불식시켰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 소장은 “사드가 북한 핵·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분명히 얘기해야 이후에 불필요한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굳이 공론화를 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라면서 “좋게 말하자면 사드는 이미 끝난 사안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부적으로 한미 간 사전 조율이 충분히 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정상회담서 끄집어낼 시 오히려 갈등으로 번질 소지가 있어 일부러 피한 게 아니냐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밖에도 한미FTA 재협상 여부나 방위비 분담 문제에 대해 양국 정상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양국 간 신뢰와 우의 등을 강조하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엇박자를 줄이려 한 시도가 되레 한미 간 갈등 요소를 확실히 불식시키는 데 제약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발표문을 통해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공정한 부담이 이뤄지게 하겠다” “한미무역협정은 그다지 좋은 딜(deal)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노골적으로 밝혔으나, 이에 문 대통령은 별다른 입장을 전하지 않았다.
박영호 강원대 초빙교수(前통일연구원 연구위원)는 “사업가 출신의 트럼프가 경제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겠다는 뜻을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재확인하려 한 것 같다”면서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힘든 북핵만 강조하기 보다는 미국인들의 입장을 고려해 일자리나 무역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회담을 이끌어가려고 한 셈”이라고 풀이했다.
“돌발 상황 없이 한미 간 원만한 관계 약속…‘절반의 성공’”
주요 사안별 논의 결과를 제외하면, 이번 정상회담이 전반적으로 한미 정상 간 우의를 다지고 한미동맹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란 평가도 있다.
특히 이전 정부와는 거리를 둔 문 대통령의 대미·대북정책 성향과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인 성격 등이 이번 정상회담의 변수로 고려되기도 했으나, 별다른 돌발 상황 없이 양국 정상이 신뢰를 단단히 다지게 됐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보인다.
송 소장은 “한미 양국 정상이 장기적인 동맹 정신을 강조하기 보단 사드나 주한미군 문제를 두고 다투진 않을지 우려했던 게 사실”이라면서 “다행히 양국 정상이 상견례 차원에서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도 “비록 주한미군 주둔비 부담이라든지 FTA 재협상 등은 우리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북핵 해법이나 한미동맹에 있어 이견이나 불협화음은 없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면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첫 정상회담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남북관계를 비롯해 한반도 문제를 다뤄가는 데 있어 한국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확보할 여지를 남겨뒀다는 데도 긍정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공동성명에서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간 남북관계 경색과 함께 북한과의 대화 주도권이 미국에게 넘어갔던 것을 고려했을 때,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 발표는 향후 한국이 남북대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 유의미한 여건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외교관은 “미국으로서는 새 정부 출범 이후 자칫 한국이 제재나 압박에 비협조한 채 대화부터 내세우지 않을지 우려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비록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국내외 여론을 의식해 다소 추상적으로 작성된 감이 없지 않지만, 미국이 한반도 통일이나 남북관계 개선에 있어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명시한 건 의의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