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모스크바 회동후 `긴급 의제’로

북핵 문제가 모스크바 다각적인 연쇄 정상회담을 계기로 해서 한.미.일.중.러 5개국의 ‘톱 어젠다’로 떠올랐다.

그간 미국과 중국 내에서 북핵 문제가 여러가지 중요한 현안 중 하나였다면 이제는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지난 11일 영변 5㎿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천여개 인출을 완료했다고 밝혀 국제사회의 우려를 일으킴에 따라 5개국의 외교노력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고, 그에 따라 각국의 외교행보도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는 북한이 지난 3월말 가동을 중단한 원자로에서 통상 3개월은 걸린다는 상식을 깨고 한달여만에 폐연료봉 인출을 완료한 점으로 미뤄 폐연료봉 재처리 일정도 상당히 앞당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폐연료봉의 수조 내 냉각기간을 감안할 때 향후 40∼50일 후에는 북한의 재처리 돌입 주장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재처리 여부를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북한을 뺀 6자회담 참가 5개국은 적어도 재처리 주장 이전에 해결의 틀을 잡지 못할 경우 북핵 구도가 매우 어려운 상황을 빠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시간지체..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다 = 북한이 위협의 수위를 ‘조급하게’ 높이는 것은 역으로 시간만 흐르고 있는 것에 대한 초조감의 반영이라는 분석도 있다.

가동을 중단한 원자로는 식히는데만 1개월이 걸리고 8천여개의 연료봉을 인출하려면 2개월은 걸린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지만 이를 1개월여만에 완료한 것만 봐도 초조한 심리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폐연료봉 인출 완료 발표와 관련, 사실 여부의 검증은 불가능하지만 북한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면 ‘무리한’ 작업과정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상황이 악화돼 6자회담의 틀이 깨지게 되면 ‘다른 수단’이 제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북한으로서는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시간만 흐르는 것에 대해 못 견뎌 하는 눈치다.

따라서 지난 2.10 외무성 성명을 통한 핵무기 보유선언과 3.31 핵군축회담 제안, 그 즈음의 영변원자로 가동중단 및 지난 11일의 폐연료봉 인출 완료 발표 등 일련의 초강수는 시간을 더 끌지않기 위한 ‘북한식’ 승부수일 공산이 커 보인다.

정공법으로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의중’을 타진해본 뒤 여의치 않으면 부시 대통령의 2기 집권기간을 ‘버티기’로 가겠다는 의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주변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조차 북핵 문제의 상황악화에 대한 미 행정부의 책임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10월 이른 바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된 이후 ‘대립’과 ‘대화’의 2년 6개월이 흘렀건만 북한의 핵능력은 오히려 강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최근 상황을 급박하게 만드는 것은 미 행정부가 의혹을 제기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가 아니라, 플루토늄 핵무기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민주당측에서는 북-미 양자회담을 거부해 북핵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맹공을 퍼붓고 있어 미 행정부는 다자해결 구도인 6자회담의 틀이 깨져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을 빠질 경우 추가공격을 받게 될 모양새다. 부시 미 행정부도 마음이 급해질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 건설적 외교조치 뭘까 = 북한의 핵실험 준비설로 위기가 극단으로 치닫던 가운데 한.미.일.중.러 5개국 정상은 지난 9일 모스크바 전승기념행사를 계기로 다각적인 연쇄 양자회담을 갖고 ‘6자회담만이 최선의 해법’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그 후 실무적인 후속외교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송민순(宋旻淳)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11일 워싱턴을 방문해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현 국면의 타개방안을 조율했고 힐 차관보와 함께 13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면서 ‘기내 회동’을 계속하고 있고,주말을 거친 뒤 오는 16일 외교통상부에서 힐 차관보와 다시 회동을 갖는다.

이어 두 사람은 18∼19일 라오스 비엔티엔에서 열리는 ‘아세안 PMC’ 고위관리회의에 참석해 중ㆍ일ㆍ러 등 3개국과 각각 연쇄회동할 예정이다.

한.중.일.러 4개국간의 양자간 실무협의도 잇따를 것으로 보이며, 북-중 채널도 보다 강도높게 가동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미간 뉴욕채널이 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5개국 정상간 모스크바 연쇄회담과 그 이전 부시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간의 전화통화 협의를 통해 현 상황에서의 북핵해결의 그림은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핵무기를 가질까 말까를 고민하는 북한에게 핵포기시 상응조치가 대체적인 윤곽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지 않았던 이라크가 그 것을 구실로 미국의 공격을 받은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북한은 핵을 포기할 경우 안전장치를 확실하게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핵을 포기한 뒤에 미사일, 인권, 마약 등의 다른 구실로 공격받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어서는 안된다고 사전에 다짐을 받고 싶어하며 그럴려면 북-미 간에 관계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법 하다.

따라서 북한을 뺀 5개국 정상의 모스크바 연쇄회동 이후 실무논의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주변국들이 북한의 생존을 어디까지 어떻게 해줄 것인 가에 초점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송 차관보의 11∼12일 방미 협의에서 한ㆍ미 양국이 합의한 “건설적으로 강화된 외교조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차후 양자 또는 다자간 협의를 통해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플루토늄 문제를 먼저 다룰 지 아니면 기존 미 행정부의 주장대로 HEU 핵프로그램 먼저 풀자고 할 지를, 그리고 미사일 문제를 포함시킬 지 아닐 지, 마약과 인권문제를 핵포기와 연계시킬 지가 핵심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한편 한미 양국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돌파구 마련을 위해 한때 힐 차관보를 대북 특사로 평양에 보내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힐 차관보가 지난 달 23일 동북아 3국 순방차 한국에 왔을 당시 우리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송 차관보의 제안으로 구체화됐으나, 미 국무부 내의 협의과정에서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외에 현재의 난국 돌파를 위해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의 당사자인 라이스 국무장관과 전직 미 대통령 등을 포함한 중량급 대북 특사의 방북 가능성이나, 상황전개에 따라서는 북한의 대미 특사 파견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다.

중국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 하다. 대북 제재의 수단으로 유형의 것 만이 아닌 ‘무형의 것도 있다’며 제재라는 수단을 택할 가능성도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일단 추가적인 상황악화를 차단하면서 중-북 협의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향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은 북-중 채널을 축으로 한.미.일.러가 중국을 통해 간접 대화에 나서는 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북-미 양자간 뉴욕접촉 등 실무차원의 접촉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여러가지 악조건으로 비관론이 대세지만 지난 8일 북한 외무성이 “우리는 6자회담과 별도의 조(북)-미회담을 요구한 것이 없다”며 이전과는 달리 대미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린데 대해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은 주권국가”라고 긍정적으로 호응하고 나선 점으로 볼 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따라서 북한의 핵재처리가 예상되는 7월 이전에 중국과 더불어 북미간 접점찾기에 주력한다는 입장이어서 주목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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