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타결, 9.19 공동성명에서 2.13 ‘공동성명’까지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 당사국의 지난한 노력이 2005년의 9.19 공동성명이라는 큰 밑그림에서 2.13 ’이행계획에 대한 공동성명’(가제)으로 구체화하기까지는 숱한 고비가 있었다.

9.19 공동성명의 기원은 2002년 10월 불거진 2차 북핵 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북한측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는 촉발됐다. 미국은 이를 1994년 제네바 합의의 위반행위로 간주하고 합의에 의거해 매년 50만톤씩 북측에 제공하던 중유 공급을 전면 중단했다.

북한은 역으로 미국의 행위가 제네바 합의 파기라고 천명하고 핵동결 해제, 북한 핵프로그램의 동결여부를 감시하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추방과 핵비확산기구(NPT) 탈퇴 선언 등 일련의 반발조치를 취했다. 위기의 파고는 높아져가기만 했다.

그러던 2003년 4월, 악화 일로를 달리던 미.북 사이에 중국이 중재자로 등장하면서 북한 핵문제 해법이 다자적인 구도를 갖추게 됐다.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이 참가해 지금의 6자회담이 탄생했다.

같은 해 8월에 곧바로 1차회담이 열렸고 2004년에 2차와 3차 회담이 순차적으로 개최되었지만 미국과 북한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고 난항은 지속됐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 원칙에서 한 치도 굽히지 않았고 이에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해보였다.

이런 와중에 2005년 2월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긴장이 한층 고조됐지만 한국 정부는 수완을 발휘해 200만kw의 전기를 직접 제공하겠다는 ’중대 제안’을 내놨고 이를 통해 북한을 6자회담 협상장으로 복귀시켰다.

그 해 9월에 개최된 4차 2단계 6자회담에서 도출된 성과물이 ’9.19 공동성명’이다.

그러나 극적 타결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은 짧았다.

성명이 도출되기 불과 사흘 전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에 소재한 방코델타아시아(BDA)가 북한 당국의 거액의 위조 달러화 예금을 받고 자금을 세탁하는 등 수백만달러 상당의 불법 금융거래를 지원해온 혐의가 있다고 지목했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애국법 제311조에 따라 이 은행을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하고 미국 금융기관들이 이 은행과 일체의 직간접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해당 은행의 불법 금융 활동에 유의토록 통보했다.

9.19 공동성명의 후속 논의, 즉 구체적인 이행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그해 11월 다시 열린 제5차 1단계 회담에서 북한은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명백한 경제봉쇄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6자회담과 금융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라면서 양측의 금융전문가간 협의를 제의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6개국 수석대표들간의 정식 회담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미측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6자회담은 이로 인해 사실상의 ’장기 휴회’ 상태에 빠져들었다. 다자의 틀이 얼마나 효용성이 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도 그럴 것이 미.북 양자간 교섭이 이뤄지지 않는 한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을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2006년 3월 양측은 뉴욕에서 북한의 위폐.금융제재 문제를 다루기 위한 양자 회동을 열었다. 신경전은 치열했지만 금융 문제로 6자회담 전체가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접촉 자체가 의미있었고 결과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회동에서 북한은 미측이 제기한 소위 ‘불법행위’를 논의하기 위한 북.미간 협의 기구를 별도로 설치할 것, 북한의 미국 은행 계좌 개설, BDA에 대한 재제 중단 등을 제안했으나 미국의 답은 한결같이 ’노(No)’였다.

6자회담 재개의 길은 더욱더 멀어져가는 듯했다.

그러던 중 북한은 7월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어 10월에는 핵실험을 강행했다. 한반도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국제사회는 단합된 모습으로 북한의 행위를 엄중히 규탄하고 추가적인 도발행위를 사전에 막기 위한 포괄적인 제재에 들어갔다. 유엔에서는 대북제재 결의안 1695호와 1718호가 곧바로 통과됐다.

북한의 잇단 도발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심판’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핵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찾기 위해 긴밀한 공조를 계속했다. 9월 중순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로 이뤄진 정상회담은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이라는 큰 틀을 마련해 6자회담 재개의 기반을 닦았다.

송민순 당시 청와대 안보실장과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고위급에서 실무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이른바 ’크게 주고 크게 받는’ 해법에 대해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 외교적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국 역시 적극 중재에 나서 꺼져가던 회담의 불씨를 살려냈다.

그 사이 미국은 중간선거를 치렀다. 민주당의 승리가 북핵 문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귀추가 주목됐다. 미국 의회 내 구도 변화로 인해 미국은 과거보다 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11월 하노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종전협정에 서명할 용의를 밝혔던 것이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다.

결국 같은 달 미.북은 베이징(北京)에서 비밀리에 전격 회동, 회담 재개를 집중 협의했고 이는 6자회담의 재개로 이어졌다. 5차 1단계 회담 이후 13개월만이었다.

이후 회담은 급물살을 탄듯 속도감있게 진행됐다.

오직 6자회담의 틀 내에서만 미.북 양자회담이 가능하다던 미측은 북한의 양자 접촉 제의에 응하기 시작해 탄력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2007년이 되자마자 미.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 3의 장소인 베를린에서 전격회동했다.

사흘에 걸친 양자접촉 끝에 북한이 진정한 핵폐기를 위해 취해야 할 초기조치와 이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를 둘러싼 모종의 합의가 도출됐다.

회동에서의 합의 내용은 제5차 3단계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지만 이 합의를 기반으로 6자회담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북한에 대한 다양한 ’지렛대’를 보유한 5개국의 동시적인 압박과 설득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2차 북핵 위기가 처음 발발한지 만 4년하고도 4개월만에 2.13 이행계획 합의라는 소중한 외교 성과를 얻어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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