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타결 의미와 전망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가 엿새 간의 숨가쁜 고비를 넘어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닻을 올리고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를 목적지로 하는 긴 항해를 시작했다.

가깝게는 2005년 9.19공동성명이 나온지 17개월 만에, 멀게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 직후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이 불거진 이후 4년4개월 만의 일이다.

◇ 배경과 의미는 =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의 말처럼 9.19성명이 1막이라면 이번 합의는 2막1장의 시작인 셈이다. 이제 `2.13 공동성명’으로 불리게 됐다.

이번 합의는 비핵화를 위한 원칙과 틀을 천명한 `말 대 말’ 합의인 2005년 9.19공동성명과는 달리 `행동 대 행동’의 실천계획 성격이라는 점에서 목표점을 향해 첫 발걸음을 뗐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특히 합의문에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명시한 것은 단순 동결이었던 제네바 합의보다 비핵화에 훨씬 더 다가선 행동으로,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보인다.

이에 따라 작년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과 유엔의 대북 제재로 형성된 파고를 넘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위기와 긴장 국면에서 대화를 넘어 평화를 위한 행동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고있다.

나아가 워킹그룹을 통해 북.미 및 북.일 대치구도를 바꿀 수 있는 관계정상화 논의가 본격화할 경우 냉전의 섬인 한반도가 봄을 맞이하고 동북아 질서 재편에 시동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벤치마킹을 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조지 부시 미 행정부로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1994년 북미 기본합의(제네바합의)와도 행동의 수위와 형식을 차별화한 점도 눈에 띈다.

이번 합의가 단 번에 나온 것은 아니다.

2005년 11월 5차 1단계 회담이 열린 이후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둘러싼 대북 금융제재 문제로 6자회담이 13개월간 헛돈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노력과 미국의 유연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9월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상황 돌파를 위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을 마련키로 합의하고 북.미 간에 6자 틀 내에서의 이른바 `회기중 양자회담’을 통해 국면 전환을 모색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작년 12월 2단계 회담과 동시 개최된 북미 간 BDA 실무회의에 이어 지난 1월 북.미 베를린 회동은 합의의 기반을 닦았다. BDA 문제를 30일 내에 마루짓는다는 미국의 담보가 북한을 움직이는 큰 힘이 됐다.

이 과정에는 지난해 미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와 네오콘의 후퇴 등 미국 내 정치 상황이 교묘하게 맞물려 들어갔다.

하지만 합의과정에서 5개국 `동등 분담’ 원칙을 놓고도 `뒷말’이 나온데다 `불능화’ 시한을 담지 못한 만큼 완전한 이행을 위해서는 향후 북한의 의지와 6자의 상호 채찍질에 기댈 수밖에 없는 면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불능화 명시와 보상품목 다원화가 핵심 = 합의 내용이 종전 북핵 합의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던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우선 플루토늄 생산 관련 시설의 폐쇄에 해당하는 `셧다운’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의 복귀를 60일 내에 하는 것으로 못박은 데 그치지 않고 `불능화(disablement)’를 이행 양태로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같은 북한의 행동들은 5자의 보상과 최대한 등가성과 동시성을 반영해 연결시켜 놓은 게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보상 원칙은 품목 다원화다.

과거 중유가 주요 보상 품목이 됐다면 이번에는 뭐든지 북한과 양자 사이에 협의가 가능하다면 중유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중유 대신 경유나 발전기를 제공해도 되고 인도적 성격의 식량을 줘도 된다는 설명이다.

종전 스탠스에 비춰 미국의 경우 식량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심지어 러시아의 경우 3월 재개되는 북한과의 경제공동위에서 자신들이 가진 채권을 북한이 양해한다면 보상용으로 쓸 수 있고 일본도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북한의 과거사 청산 요구에 대한 카드로 사용할 수 있어 보인다.

다른 특징은 일종의 성과급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북한이 일단 핵시설을 셧다운하고 IAEA 사찰관이 복귀한다면 동시에 중유 5만t을 제공하도록 돼 있고 불능화 조치를 중유 95만t으로 환산할 수 있는 품목으로 보상하도록 돼 있다.

일종의 기본급 없는 성과급인 셈이다.

정부 당국자는 “빨리 행동하면 빨리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5자의 보상 원칙은 역시 균등분담 원칙을 명시하고 부속 합의서를 통해 내부 정치상황이 복잡한 일본처럼 내부 사정이 있는 국가는 분담 시기를 조금 늦출 수 있도록 유연성을 발휘했다.

특히 6자 외에 다른 국가에도 문호를 개방한 것도 특징이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로서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경수로사업에 이어 또다시 `덤터기’를 쓰게 됐다는 여론의 화살을 비켜갈 수 있게 됐다.

이런 합의에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상징과 원조로 각각 간주해왔던 테러지원국 지정과 적성국교역법을 면제하는 과정을 60일 내에 시작하는 내용을 합의문에 담은 것이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복잡한 문제는 1개월 내에 출범할 ▲한반도 비핵화 ▲경제.에너지 지원 ▲미.북 관계 정상화 ▲일.북 관계 정상화 ▲동북아 평화안보 메커니즘 등 5대 워킹그룹을 구성해 넘기기로 했다.

이 밖에도 이번 합의의 격이 공동성명 수준의 정치적 강제력을 확보했다는 점과 차기 6자회담 날짜(3월19일)를 6자회담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못박아 넣은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6자회담 참가국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하기로 한 것은 향후 동북아의 평화 안정을 도모하는 촉매 역할을 기대케 하고 있다.

◇ 곳곳에 지뢰밭..낙관만 힘들어 = 이번 합의를 통해 작게는 한반도 비핵화, 크게는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됐다.

우선 한 달 내에 가동할 5대 워킹그룹의 운영 방향과 3월로 잡힌 6자회담, 60일 내에 이뤄질 초기 조치의 향배에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다.

워킹그룹이 차기 6자회담에 앞서 들어갈 공산이 크다.

워킹그룹은 해당 분야의 추후 행동들을 뽑아내고 6자회담에 보고해 단일 로드맵을 만드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60일 내의 초기 조치는 향후 이번 합의가 제대로 이행될 지 여부를 내다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여기에는 핵시설 폐쇄와 중유 5만t 지원, 테러지원국 문제 등 만만치 않은 현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잠복해 있는 현안으로는 BDA 문제가 꼽힌다. 북.미 베를린 협의를 통해 30일 내에 마무리될 전망이지만 이 과정에서 해제될 합법계좌 규모 등을 놓고 이견을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동북아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관심사는 남북관계다. 그동안 6자회담에서 이뤄질 모종의 합의를 대북 지원 재개의 출구로 봤던 정부의 입장에 비춰 작년 7월 이후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던 남북관계가 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선(先) 대화, 후(後) 지원 입장에 가깝기 때문에 북한의 급박한 식량난 등을 감안할 때 북한과 5자의 초기조치에 앞서 남북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와 함께 남북정상회담 개최 여부도 주시 대상이다. 이런 움직임이 가시화될 경우 6자회담 외교장관 회담이나 시기적으로 뒤로 밀려 있는 듯한 6자회담 밖의 당사자간 평화체제 포럼 출범과도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은 행동으로 구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단순히 비핵화 문제 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 북.미 및 북.일 관계, 대북 지원 등 다양한 이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미 관계 정상화 워킹그룹에서 난관이 조성되면 에너지.경제지원 워킹그룹은 물론 6자회담 본회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상황이 평화가 불안정하지만 전쟁을 막는 소극적인 평화유지(peace keeping)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는 항구적이고 적극적인 평화구축(peace making)을 위한 험난한 과정이 펼쳐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초기행동만 볼 때도 핵시설 셧다운과 IAEA 사찰관 복귀 등의 과정과 중유 5만t 지원이 맞물리는 상황에서 돌출 변수가 튀어나올 수 있다.

일본이 납치 문제 진전 없이는 대북지원에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인 만큼 북.일 관계 정상화 포럼에서 희망이 엿보이지 않을 경우 균등분담 원칙이 흔들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불확실성을 넘어 합의의 확고한 이행이 어느 선까지 가능할지, 비핵화 협상의 2막1장을 제대로 열어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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