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5000원권 교환…’김일성 초상화’는 어디로?

북한은 8월 1일부터 조선중앙은행 각 지점을 통해 5000원권 교환을 시작했다. 아직까지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는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데일리NK의 최초 보도처럼 신권(新券)에는 김일성 초상이 빠졌다. 구권(舊券)의 뒷면에 있던 ‘만경대 고향집'(김일성 생가) 도안이 신권 앞면으로 들어갔고, 신권 뒷면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이 추가됐다.  

김일성 초상화가 빠진 5000원권 발행 배경을 두고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설(說)은 크게 두세 가지다. 하나는 김정은이 ‘화폐 우상화’를 중단함으로써 김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추측은 북한 당국이 주민들의 장롱에 쌓여 있는 현금을 수거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여기에는 ‘위조방치 조치’라는 상상력도 더해진다.

5000원 신권 발행을 북한의 통화정책 범주로 해석하려는 시각은 2009년 11월 5차 화폐개혁이 남긴 후과에 의존한다. 당시 화폐개혁은 구권과 신권을 100대 1 비율로 교환했다. 문제는 교환 범위를 가구당 구권 10만 원(추후 50만 원까지 확대)으로 제한한 것이다. 화폐개혁을 통해 주민들의 쌈짓돈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북한 당국은 신권을 남발할 수 있었다. 결과는 혹독했다. 북한 시장물가는 3개월 만에 2009년 11월 수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 5000원권 교환은 2009년 화폐개혁과는 그 조건이 전혀 다르다. 단순한 화폐교환일 뿐이다. 1인당 교환액수에 제한이 없으며, 교환기간은 무려 2017년까지다. 북한 당국이 화폐개혁을 통해 주민들의 쌈짓돈을 빼먹는 방법으로는 ‘일정기간 예금 후 신권으로 인출’이라는 조치가 있는데, 이런 단서도 붙지 않았다. 1992년 화폐교환과 2009년 화폐개혁 당시 구권을 북한 은행에 예금했다가 일정기간 이후에 신권으로 출금토록 했다. 하지만 실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맡겨 둔 돈을 찾으러 가도 “은행에 보관 중인 현금이 없다”면 그만이다. 1992년에는 순진한 북한 주민들이 조선중앙은행에 구권을 예금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으나, 2009년에는 아예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당국이 지하경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5000원권을 교환하고 있다는 분석은 무척 황당하다. 더구나 이런 분석이 국가정보원에서 나왔다. 지난달 31일 국회 정보위원회는 이병기 국정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5000원 신권 발행을 ‘신흥 부유층의 지하자금 양성화’로 평가했다. 실제 이 원장이 이렇게 발언했는지, 아니면 기자들에게 이 내용을 전한 정보위 간사들이 잘 못 전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여당 간사)은 기자 브리핑에서 “북한 당국이 가진 자들의 돈을 더 내놓으라고 신권을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야당 간사) “약간의 사재기 혼란이 있었다고 한다”면서 국정원의 보고를 전하기도 했다.

물론 북한에서 5000원권은 현존 최고액권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 5000원권을 한국 5만 원권과 비슷한 것쯤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8월 현재 북한 시장 쌀 가격(kg)은 6000원 전후로, 북한 최고액권으로 쌀 1kg도 살 수 없다. 북한의 시장에서는 이미 가전제품 등 고가제품의 가격은 ‘위안(元)’으로 매겨지고 있다. 순전히 거래의 편리성 때문에 만들어진 관행이다.

전기가 부족한 북한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이 중국산 12V 배터리를 갖고 있다. 생필품 중에서도 생필품이다. 북한 시장 매대 상인에게 “12V 배터리 얼마냐”고 물으면 상인들은 “200원”이라고 답한다. “24만 원(圓)”이 아니라 “200원(元)”이다. 상인들은 북한 돈 5000원권 48장이 아니라, 중국 돈 100위안짜리 2장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5000원권은 재산을 늘리는데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북한 당국이 언제 화폐개혁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돈은 언제라도 종잇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2009년 화폐개혁이 남긴 교훈이다. 결국 거래 편의나 재산 저장에서나 북한 5000원권은 이미 최고액권으로서 자격을 상실했다. 상황이 이 정도니 북한 당국이 ‘위조 예방’ 차원에서 신권 5000원을 발행했다는 추측은 거론조차 민망하다. 

북한 5000원 신권 발행이 단순한 화폐교환이 아니라면 결국 남는 답은 ‘김정은의 정치적 고려’다. 이번 5000원권 교환의 핵심은 김일성 초상화가 있는 구권을 수거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김일성 초상화가 없는 신권을 배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에게 김일성의 초상화와 5000원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북한정권이 발행한 화폐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47년이다. 100원, 10원, 5원, 1원 등 4종의 신권을 발행했다. 화폐개혁의 목적은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유통됐던 화폐와 소련 군정(軍政)이 발행한 군표(軍票)를 수거하는 것이었다. 신구권의 교환 비율은 1대1. 1949년 5월에는 50전, 20전, 15전 등 보조화폐도 발행했다.







1979년 발행된 100원권. 최초로 김일성 초상이 들어갔다.<사진=데일리NK>
2차 화폐개혁은 1959년 실시됐다. 목적은 6·25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고 새로운 경제계획 실시에 따른 투자재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구권과 신권의 교환 비율은 100대 1.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50전 등 6종의 신권이 추가 발행되었고, 10전, 5전, 1전 등 3종의 주화가 나왔다. 교환 한도 제한은 없었다.

김일성이 북한화폐에 등장한 것은 1979년 3차 화폐개혁부터다. 당시 북한은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등 5종의 신권과 50전짜리 주화를 새로 발행했다. 구권과 신권의 교환 비율은 1:1, 교환 한도는 없었다. 오직 ‘새로운 화폐 도안’만 필요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10전, 5전, 1전 등 소액 주화는 교환 없이 기존 것이 그대로 유통됐다. 이때부터 북한의 최고액권에 김일성 초상이 들어갔다.







1992년 4차 화폐개혁 당시 발행된 100원권.
1979년이면 북한에서 김일성 유일영도체계 확립은 물론이고, 김정일 후계까지도 완성된 시점이다. 김정일의 주도로 전 사회적으로 김일성 우상화가 일상화되고 있었다. 중국이 100위안, 50위안, 20위안, 10위안 등 주요 지폐에 모택동 초상을 담았던 것과 달리 북한은 최고액권인 100원권에만 김일성 초상을 넣었다.

최고액권에 김일성 초상을 넣는 정책은 1992년 4차 화폐개혁 이후 ‘전통’으로 확립됐다. 다만 김일성 초상 모양이 달라졌다. ‘인민복’ 차림의 김일성 정면상(像)이 넥타이와 양복을 입은 김일성 측면상(像)으로 교체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화폐개혁과 상관없이 신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1998년 500원권이 최초다. 그런데, 이 때 발행된 500원권은 좀 미묘한 구석이 있다. 북한이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던 시절에 발행됐다. 전면 도안으로 김일성 시신이 보관되고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이 채택됐다. 실제 금수산기념궁전 보다 김일성 초상이 약간 크게 도안되기는 했으나, 김일성 초상이 없는 유일한 최고액권이었다. 어쨌든 금수산기념궁전과 거기에 걸려있는 김일성 초상이 신권 도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점에서 ‘김일성 우상화’는 유효한 듯 보인다. 4년후 1000원권이 나오기 전까지 김일성 초상이 없는 최고액권이었다.







2002년 발행된 1000원권.
북한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취하면서 1000원권을 새롭게 내놓았다. ‘국정가격 상향 조정’이라는 7·1조치 기조에 따른 고액권 발행이다. 이때 1000원권에 다시 김일성 초상이 전면을 차지했다. 김일성 초상 도안은 100원권과 똑같다. 당시 200원권도 최초 발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목란’이 들어갔다. 최고액권에만 김일성 초상이 들어가는 관례가 이어진 것이다. 2005년 최초 발행된 5000원권에서도 100원권에 있던 김일성 초상이 다시 채택됐다.







2005년부터 유통된 5000원권.
1997년 발행된 500원권을 제외하면 1979년 이후로 최고액권을 발행할 때마다 항상 김일성 초상이 활용됐다. 북한의 최고액권 전면에는 김일성 초상화가 있다는 공식이 만들어진 셈이다. 신규 최고액권에 김일성 초상이 들어가면, 다음번 화폐개혁에서는 기존의 지폐에 있던 김일성 초상들이 삭제된다. 2009년 화폐개혁 당시 발행된 신권 100원권, 1000원권에서 김일성 초상이 모두 빠졌다. 동시 발행된 신규 2000원권에도 김일성 초상은 없었다. 이미 5000원권에 김일성 초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화폐개혁에 따라 발행된 신권 5000원권에서는 김일성 초상 도안이 변했다. 17년간 재탕되던 정장차림의 젊은 김일성이 빠지고, ‘태양상’이라고 불리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안경까지 쓴 늙은 김일성이 들어갔다.







2009년 발행된 100원권. 5000원권에 김일성 초상이 들어가자 이때부터 100원권에서는 김일성 초상이 빠졌다.
지폐를 통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과정을 복기해보면, 이번 신권 5000원권에 김일성 초상화가 빠진 배경이 분명해진다. 구권 5000원권이 시중에서 모두 수거되는 순간, 북한 화폐에서 김일성 초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과연 이것이 김정은의 의도일까? 김정은은 정말로 북한 화폐에서 김일성 초상을 완전히 지우려고 하는 것일까?

김정은이 김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도한다는 분석 자체도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북한 지폐에서 김일성 초상을 지우는 방법으로 김정은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는 가설은 그 효용성부터 의심스럽다.








2009년 발행된 1000원권. 5000원권에 김일성 초상이 들어가자 이때부터 1000원권에서는 김일성 초상이 빠졌다.
‘백두혈통’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김정은이 김일성 우상화와 결별한다는 것은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 뛰어드는 꼴이다. 지난 3년간 김정은은 북한의 모든 조형물과 김일성 동상에 김정일을 나란히 세우는 작업을 벌여왔다. 지난달에는 신의주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세웠다는 소식을 조선중앙방송과 노동신문을 통해 선전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오직 화폐에서만 김일성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가설이다.

북한 내부에서는 ‘1만 원권 신권 발행설(設)’이 확산되고 있다.


데일리NK 북한 내부소식통들은 “북한 돈에서 수령님 초상을 없애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북한 당국이 1만 원권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최고액권을 이용한 김일성 우상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게 된다. 구권 5000원권이 어느 정도 수거되는 시점에서 1만 원권을 발행하게 된다면 북한 최고액권에서의 ‘김일성 유고(有故)’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 내부에서 “김일성 초상이 갈 자리(1만 원권)를 마련해 두고, 김일성 초상을 지우는 것(5000원권)”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2009년 교체된 5000원권. 젊은 김일성 대신 늙은 김일성(태양상)으로 교체됐다.
경제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현재 김정은이 고액권 발행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는 분석이 자연스럽다. 집권 2년 동안 다소 안정되던 시장 물가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고, 각종 우상화 사업과 건설 사업은 북한 당국의 재정지출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무엇이든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통화량을 늘리는 것처럼 손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중앙은행이 의회나 언론의 견제를 받는 민주국가조차 정부의 통화증대는 흔한 ‘정치적 선택’이 된다. 북한 김정은이라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거 사례만 놓고 보자면, 북한의 1만 원권 발행은 화폐개혁과 무관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500원권, 1000원권, 5000원권 등은 화폐개혁과 상관없이 등장했다. 문제는 북한 화폐의 액면가가 높아지는 만큼 김정은 체제의 위기도 동반 상승한다는 점이다. ‘사라진 김일성 초상’은 지금 우리에게 더 많은 주의(注意)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 지폐에서 ‘김일성 이장(移葬)’은 다양한 정치 경제적인 요인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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