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개발의 대부는 김大 서상국 교수

핵실험을 포함해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한 인물은 서상국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 강좌장(학과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 교수는 1966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구소련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김일성대 교수로 복귀한 뒤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8년 11월30일 당시 60회 생일을 맞은 서 강좌장에게 이 같은 공로를 평가해 환갑상을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서 교수가 이국에서 태어나 광복 후 북한에서 고급중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면서 “그는 지난 30여 년간 후대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을 벌이면서 ‘양자역학’, ‘소립자이론’ 등 40여 편의 저서와 100여 건의 가치있는 소논문을 집필했으며 8명의 박사와 20여 명의 학사(석사)를 키워냈다”고 소개했다.

이 통신은 김정일 위원장이 “후대교육사업과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최신과학분야를 개척하는데서 그가 이룩한 성과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김일성상’과 노력영웅 칭호를 비롯한 국가표창을 수여하도록 배려해주고 대회와 행사들에 불러 수령님(김일성)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안겨줬다”고 전했다.

서 씨의 공식직함은 김일성대 강좌장이지만 국방위원회의 극비위원으로 핵실험을 포함해 북한의 핵계획과 관련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는 거의 하지 않고 평양북도 영변의 핵시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서 씨는 러시아 지역을 홀로 여행하면서 과거 소련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인맥을 활용해 핵관련 시설이나 부품을 북한으로 반입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는 후문이다.

국가적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서상국씨는 이에 걸맞은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데 그가 사는 아파트는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철저히 경호를 하고 있으며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프랑스 등 서방국가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는 정도라고 한다.

서 씨는 구 소련에서 유학시절 워낙 수재로 소문이 나서 소련 측의 귀화 종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은 그를 본국으로 소환한 뒤 ‘혁명화’ 차원에서 지방에 내려보내기도 했으나 핵개발을 위해 다시 소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 씨가 북한 핵개발의 ‘대부’라면 1990년 사망한 도상록 김일성종합대학 핵물리강좌장은 북한 핵이론의 기반을 닦은 선구자.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구역에서 태어난 도씨는 1932년 일본 도쿄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활동했고 당시 그는 ‘헬륨화 수소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국제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광복 후 서울대학에서 일할 계획이었지만 김일성 주석의 자필 초대장을 받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1946년 개교 이후 물리학부 초대 학부장, 물리강좌장, 핵물리강좌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도상록씨에 대해 “핵구조이론, 양자역학, 원자로물리 등 교과서와 참고서 30여 종을 집필하고 핵가속장치를 비롯한 핵물리 실험장치를 개발하는 등 ‘원자력 부문의 첫 교육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50년대부터 구 소련에 핵과학자들을 보내 핵개발을 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에서 통일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호석씨는 지난 2000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북한과 소련은 지난 1956년 3월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 창설에 참여하는 협정을 맺고 과학자를 연수시키기 시작했다”며 “이 당시부터 지난 1991년까지 200여 명을 이 연구소에 파견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북한은 19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자 많은 돈을 들여 구 소련 등으로부터 핵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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