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의 忠臣가문 출신 ‘최룡해’, 그의 운명은?

북한군(軍) 총정치국장 최룡해는 김일성과 가장 친근했던 전우(戰友)이자 핵심 심복이었던 충신(忠臣) 중의 충신인 ‘항일 빨치산’ 최현의 둘째 아들로 김 씨(氏)가계와 대(代)를 이어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어린시절 최룡해는 김일성을 ‘큰아버지’로 부를 정도로 김일성의 집에 머무른 경우가 많았으며, 김경희와는 ‘누나-동생’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김정일의 이복형제인 김평일(현재 주폴란드 대사)과는 남산중고등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또한 오극렬(‘항일 빨치산’ 유격대 오중성의 아들)과 함께 김정일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소문도 있으며, 과거 최룡해 ‘혁명화 과정’ 당시 오극렬이 최룡해의 아들을 작전부 산하 자연과학 수재대학인 ‘모란봉 대학’에 입학시켜서 돌봐주는 등 최룡해와 오극렬이 각별한 사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최룡해는 아버지 최현의 후광에다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직접 발휘함으로써 김일성·김정일 부자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으면서 권력 중심부에 입성하였다. 더군다나 북한에서 보통 빨치산 세대 자녀들은 능력도 없고 방탕한 경우가 허다한 데 반해 최룡해는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도 보좌할 수 있는 업무능력과 기질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북한 주민과 간부들도 최룡해가 아버지 최현의 ‘반(反)김일성파 진압 일화’ 등으로 인해 ‘김 씨 가계를 절대 배반하지 않을 인물’로 대부분 인식하고 있다.

또한 뇌출혈로 병사한 맏아들 최룡택 전(前) 당 간부부 부부장과 달리 차남 최룡해는 영민하여 만경대 혁명학원→강건 군관학교→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쳐 빨치산 2, 3세 및 당료(黨療)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하였다. 최룡해는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 1996년 1월 ‘청년동맹’으로 개칭)에서  당 중앙위 선전부 부부장 및 부장, 과외교양 부위원장을 거쳐 빠르게 승승장구하여 1986년 8월에 사로청위원장의 자리까지 앉으면서 북한 권력의 중앙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사로청은 북한 노동당의 후비대(계승자)라고 말하는데 북한 모든 사회성원들은 의무적으로 소년단과 사로청에 가입해야 하며 사로청 조직생활의 통제속에서 단련되는데 당·군·내각 등 북한 내 모든 조직구성에 사로청 조직이 없는 기관은 없다. 각 기관마다 초급 당집행위원회가 있는데 여기에 각 기관별로 사로청위원장이 집행위원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북한에서 사로청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즉 사로청(청년동맹)은 장차 북한노동당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인물들을 양성하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당 조직지도부를 비롯, 북한 내 중앙 및 도(道)급 당 기관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청년시절 사로청 조직부문에서 일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들로,  최룡해는 이러한 사로청을 10년간이나 장악하였고 이를 통하여 이미 김 씨 가문에 준비된 미래 인재로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최룡해는 1986년에 사로청 중앙위원장이 된 후 1998년 실각할 때까지 12년간 최장수 사로청위원장이었는데 북한 역사에서 그 당시야말로 사로청(청년동맹)이 제일 강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기에 청년동맹 생활을 하였거나 그 조직의 중심부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은 소탈하고 의리를 중시하고 유머감각도 겸비한 최룡해의 존재감에 대해 긍정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매건 마다 김정일에게 즉각 보고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을 순식간에 해결하는 최룡해의 능력에 대해 모든 사람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청년동맹 재직 시 50개국 방문 등 해외견문이 넓은 데다 과감한 성격으로 인해 현재 북한 내 간부 중 소위 ‘김정은과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최룡해가 북한 내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사건은 1989년 8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당시 북한은 동(同) 축전 개최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88 서울 올림픽’을 의식하여 무리하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최룡해는 동 대회 준비위원장을 하면서 남다른 조직적 수완과 관리 능력을 보여주며 각종 준비사업을 잘 처리하였는데, 이때부터 최룡해에 대한 김정일의 믿음도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후 김정일은 최룡해 처(妻)와 아이를 병 치료 및 요양차 일본에 보내주는 특혜도 베풀어주었는데 그때까지 북한 사람들 중 가족들이 일본에 치료차 간 사례는 유일하게 고영희와 그 가족들뿐이었다고 한다. 이어 1993년 2월 개최된 제8차 사로청대회가 최룡해 명성의 최정점이었던 시기였는데 그때가 최룡해의 조직 장악력도 최고조로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대회장에서 최룡해는 사로청 500만 명과 소년단 300만 명을 대표하여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800만 명의 총폭탄’이 되겠다는 충성맹세모임을 처음으로 진행하였으며, 동 대회를 통해 김정일을 칭송하는 노래인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라는 노래를 대회장에서 함께 부르면서 김 부자 우상화와 세습체제 구축을 선도하였다.

그런 최룡해에게도 시련이 닥쳐오는데 1997년 6월 ‘보천보전투 승리 60년 행사’ 참석을 마지막으로 최룡해는 ‘청년동맹 황색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사업 정지·출당 조치되어 약 5년간의 혹독한 ‘혁명화 과정’이라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청년동맹 황색사건’은 대중(對中)무역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당간부들에게 뇌물을 상납하려다가 당조직지도부 및 군보위사와 보위부의 합동 검열에서 적선(敵線) 연계 간첩혐의로 청년동맹 부위원장급 대부분이 연루돼 8명이 처형된 사건으로 당시 최룡해는 처형을 면했다. 이 사건 배경에는 김일성 사망(1994. 7)이후 ‘고난의 행군’시기 수백만 명의 아사자 발생 등으로 주민들의 불평불만이 팽배하자 내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에서 북한 전역(全域)에 걸쳐 숙청의 회오리 바람을 불게 하였다. 특히 합동 검열과정에서 최룡해에 대한 비리들이 드러나자 당조직지도부가 이를 김정일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김정일은 청년동맹 전체 간부들을 모아놓고 최룡해에 대한 비판투쟁을 벌리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최룡해에 우호적이었던 상관(上官) 장성택을 비롯, 간부들과 측근들이 최룡해를 피했으며 가장 가까웠다고 여겨왔던 사람들도 최룡해의 비리와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폭로하며 최룡해를 단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최룡해가 체포되어 좌천될 당시 청년동맹 내부적으로는 ‘능력이 뛰어나고 일을 실질적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인데 아깝다’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다’ 등 평판이 돌았다. 1998년 2월 최룡해는 자강도 임산사업소 노동자로 좌천되었을 때 자신의 과오를 100% 인정하면서 김정일에게 10여 차례 충성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에는 자기비판과 함께 자신 때문에 아직도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는 부하들을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이에 김정일은 최룡해에 대해 ‘남자고 의리가 있다. 일꾼은 이래야 한다’ 며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였다.

이 와중에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이었던 황순희를 비롯, 리을설 등 ‘빨치산’ 출신 원로 12명이 김정일을 수차례 찾아가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황순희는 유명한 여성 빨치산 출신이자 6.25 당시 105 탱크사단장이었던 류경수의 부인으로 김정일을 만날 때마다 가장 가까운 전우였던 최현과 김철호(최룡해 모친)와의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최룡해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다 ‘혁명화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최룡해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는데, 유독 연형묵 당시 자강도 당책임비서만은 최룡해가 곧 재기할 것으로 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고 한다.

한편 최룡해는 상당한 애처가인 걸로 알려져 있으며, 5년여간의 ‘혁명화 교육’ 당시 자신의 딸이 동상에 걸려 얼굴이 망가진 것에 대해 직속부하였던 계봉세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가족애(愛)가 강하다고 한다. 권력가도에서의 좌절과 복직 그리고 새로운 승진과정은 정치가 및 권력가로서의 최룡해를 더욱 노련하게 만들었다. 황순희 등 빨치산 원로들의 계속된 간청이 통하여 최룡해는 2003년 8월 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복직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대인관계를 잘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가 주변을 의식하고 조용히 견디어 낸 것은 얼마 안 있어 새로운 자신의 무대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며 과거 청년동맹 수장(首長)으로서 김정일과 독대하던 시기를 회상하며 더 큰 야심을 가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권력가도에서의 좌절과 복직 그리고 새로운 승진과정은 정치가 및 권력가로서의 최룡해를 더욱 노련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2월 김정일은 최룡해와 그의 처를 불러 4시간 동안 만찬을 함께 하면서 격려한 뒤 최룡해를 황해북도당 책임비서로 보낸다. 도당책임비서는 도내 모든 기관에 대한 당적(黨的) 지도와 인사문제는 물론 경제부문들에 대한 간섭과 통제, 그리고 주둔 군부대에 대한 간섭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한 자리이다. 최룡해가 도당책임비서로 부임하면서부터 북한 내에서도 제일 낙후된 황해북도가 눈에 띄게 발전하였는데, 김정일이 최룡해에게 “네(최룡해)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봐라. 내(김정일)가 밀어주겠다”고 하면서 모든 특권을 다 주었다고 한다. 당시 최룡해는 중앙당의 자금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을 많이 진행했는데, 사리원 민속촌과 발전소 건설은 물론 사회주의 문화주택 건설 등 단기간 내 가시적인 성과들을 통해 업무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이에, 김정일도 수차례 직접 황해북도를 찾아가 최룡해를 격려해 주었다.

또한 김정일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시 육로를 통해 방북(訪北)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비서 김기남 이나 김양건이 아닌 최룡해가 직접 마중토록 하는 파격적인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황북도당 책임비서 시절 최룡해는 2009년 11월 화폐개혁 실패로 인해 경제 혼란상과 함께 주민생활이 어려워졌다는 내용을 목숨을 걸고 김정일에게 보고하여 실태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돌았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김정일이 최룡해를 당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제강의 후계자로 낙점했으며, 김정일이 뇌졸중을 앓고 난 후 후계구도에 결심을 굳히면서 최룡해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고 보고 있다.

2008년에 들어서면서 김정은은 김정일을 수행하고 보위부대학을 방문하는 등 후계자로서의 베일을 벗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정은을 보필해 줄 충신들이 필요했는데, 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김정은을 보좌해 온 조직지도부 리제강과 리용철은 당시 80세가 넘은 고령이었으며 당비서들과 기관장들도 대부분 70∼80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중후하고 노련미가 넘치는 60대 전후의 최룡해는 어디를 따져봐도 후계자 보필을 맡길 최고의 적임자였다고 한다. 더욱이 김정일이 볼 때 최룡해는 대를 이어 김 씨 일가에 충성하는 북한 내 최고 충신가문의 자손으로서 김 씨 일족과 운명을 함께할 수 있는 인물로 다양한 권력 경험과 정치 연륜이 있고 조직 장악력도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김정은 정권을 잘 받들 수 있는 능력과 정치적 감각이 있다고도 보았을 것이다.

일례로 2009년 1월 ‘105 탱크사단(6.25 동란시 최초 서울 입성부대)’ 방문 시 김정은의 지시로 최룡해는 김정은이 운전한 전차(戰車)에 동승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김정일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포하면서  최룡해를 당근로단체 비서로 승진시키고 군 직책을 맡기도 전에 인민군 대장 계급장을 부여받는 등 최룡해는 김정일에 의해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공식 발탁되었다. 결국 김정은도 김정일 사망 후 2012년 4월 최룡해를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하고 당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내세우면서 3대세습 굳히기의 최고 책임자로 만들어 주었다. 더군다나 최룡해는 과거 건설분야 이외에도 예술(사로청 과외교양 부위원장)·체육 방면에서도 경력과 능력을 쌓았다는 점에서, 현재 이러한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김정은의 보여주기식(式) 정책추진에 핵심적 역할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룡해는 명실상부한 김정은 정권시대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황해북도 당책임비서 당시 최룡해를 만나본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속내를 숨기고 주변관리에 철저히 신경 쓰는 스타일로 변했다고 하였다. 최룡해가 청년동맹 사업을 담당하면서 조직 장악력과 추진력을 모두 겸비하였으며, 상하 간 신망이 두터울 뿐 아니라 험난한 ‘혁명화 과정’도 극복한 강한 의지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은 북한 내 중론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주목되는 점은 북한 주민들이 최현의 항일 빨치산 경력이 김일성보다 능가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백두혈통’의 정통성이 김정은보다 최룡해에게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룡해가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나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과연 김정은 곁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김정은의 손에 의해 장성택처럼 비운의 숙청을 당할 것인지, 아니면 반기(反旗)를 들어 새로운 지평을 개척할 것인지 등 최룡해가 역사에 어떤 인물로 기록될지는 현재 진행형의 물음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