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저녁에 시작된 4일간의 마라톤 남북회담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북한은 ‘지뢰폭발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준전시상태를 해제’한다. 한국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대북확성기방송을 중단’한다. 남북은 ‘서울 또는 평양에서 당국회담 개최’, ‘이산가족 상봉’을 그리고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대통령부터 ‘사과와 재발 방지대책 없이는 절대로 합의하지 않겠다’는 원칙의 고수를 천명했고, 대부분의 국민들과 모든 장병들이 김정은의 전쟁협박에 ‘전쟁불사’를 결심하면서 한국정부의 원칙적 대응에 힘을 실어주었는데, 고작 북한이 내놓은 것이라고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유감표명’뿐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발 방지대책이 명시되지 않고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표현이 주관적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명의 젊은 군인을 평생 불구자로 만든 북한정권에 일방적으로 경제지원을 하겠다면서 한국정부는 어떤 원칙을 관철하였고 무엇을 북한으로부터 얻어냈느냐는 비판이 적지 않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정부가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은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애걸복걸할 때까지 더 시간을 끌며 더 확실한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갑의 역할’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합의문만을 보면 일리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지난 5일간 남북의 마라톤 회담을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태의 의미는 다른 데에 있다.
필자가 지난 며칠 사이에 쓴 칼럼에서 분명히 주장하였듯이, ‘북한의 지뢰도발-한국의 대응-북한의 저강도 도발-한국의 대응-북한의 전쟁협박’과 함께 ‘북한의 회담 제의’라는 화전양면 작전은 통일전선부장 김양건과 정찰총국장 김영철을 비롯한 김정은의 수하들이 미리 계획한 것이다. 즉 이들은 임기 중반을 넘긴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실현을 위해서는 결국 자기들의 제의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작전을 시작했다. 바꿔 말해 김정은 정권은 압도적인 갑의 위치에서 한국에게 지뢰도발에 의한 희생을 감수시키면서 경제지원의 빨대를 꼽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특히 작년 아시안게임 기간 중에 별안간 찾아온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을 ‘버선발로 뛰어나가듯’ 환영한 한국의 안보팀과, 이들이 요구하지도 않은 대통령 면담을 한국정부가 먼저 제의한 사실에서 북한 측은 한국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열망의 강도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남측과 관계개선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대남도발을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공식이며 조폭집단의 논리상 그럴 수밖에 없고 이번에도 지켜졌다.
물론 김정은 정권은 한국 국민에게 지뢰도발에 대하여 ‘분명하게 사과하고 재발방치 대책을 천명’하기보다는 차라리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정권에게 한국의 경제지원은 매우 달콤하겠지만 없으면 정권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의 생존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내외적으로 공표한 준전시 내지는 전쟁협박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어서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정권유지가 힘들만큼 권위를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한편 한국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 북한의 애매한 ‘유감표명’과 함께 주관적 해석을 요구하는 ‘재발 방지대책’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이번 박근혜 정부가 마라톤 접촉을 통해 얻어낸 것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합의문 내용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박근혜 정부는 8・25회담 이후 북한은 과거의 북한이 아니고, 한국 역시 과거의 한국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것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북한의 유감표명보다 훨씬 중요한 점은 이번 회담을 통해 김정은 정권 내부의 모든 것을 엑스레이를 통해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김정은은 한국에 어떤 전쟁협박을 하더라도 그것이 허장성세에 불과하다는 점을 만천하에 이실직고하였다. 특히 김관진 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며칠간이나 집요하게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여도 황병서와 김양건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지도 못했고, 김정은은 이들을 불러들이지도 못했으며, 공개적으로 약속한 전쟁이나 도발도 하지 못했다. 김정은은 내부적으로 나이 많은 고모부와 장군들을 고사총으로 잔인하게 죽일 수 있지만, 밖으로 내뱉는 전쟁협박은 이제 부도난 수표처럼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확고한 원칙과 국방부 장관 이하 전 장병의 강한 대응, 그리고 한미군사동맹의 작동 및 국민들의 전적인 지지였다. 김정은과 그의 일당은 이점을 예상하지 못했다.
반면에 한국의 20대 현역군인, 예비군을 비롯하여 50~60대 노장층까지 전쟁이 나면 자원하겠다는 결의가 번져 나갔다. 걸어 다닐 수 있고 아직 총 쏘는 법을 알고 있기에 전쟁에 나가겠다는 60대 중반의 평범한 국민들을 필자는 여러 번 만났다. 이들의 분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 온 것이며, 이들은 이번 지뢰도발의 주역인 김영철의 두 다리를 잘라오라고 요구하였다. 특히 전역을 스스로 연기한 병사들이 줄을 이은 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한국 국민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하지만, 북한의 전쟁협박에 비굴하게 굴복하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다고 무서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무조건 한국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에 대한 원칙적 대응을 ‘전쟁하자는 것이냐?’며 비토하던 야당과 한국 좌파의 행태, 그리고 이들의 상투적인 반미주의는 이제 한국 국민에게서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은 확고한 한미군사동맹이 한반도의 평화와 전쟁의 억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하였다. 그동안 야당과 한국좌파는 비굴을 정의로 둔갑시키고 국가수호 의지를 전쟁광으로 몰아부쳤지만 국민은 이들의 의도와 달리 비판보다는 무시와 경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번 남북회담에서 확인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같은 남북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일방적인 구애가 아니라, 대북확성기방송처럼 북한 정권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대북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며칠 만에 그동안 대꾸조차 않던 남북 간의 대화 제의를 스스로 먼저 제안하고 나섰다. 이점을 한국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언론도 그리고 모든 국민이 지켜보았다. 이를 통해 그동안 북한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무조건 북한에 퍼주고 선의로 접근해야 한다는 햇볕정책이 얼마나 허황된 망상이었는지가 확인되었다.
어제 휴전선의 대북확성기 방송은 중단되었지만, 남북대화와 지속적인 남북교류를 원한다면 한국은 북한 정권의 목에 비수를 겨누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이 한국의 목에 장사정포, 핵과 미사일 그리고 화생방무기라는 비수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마치 북한 정권의 자연권처럼 간주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도 북한에게 비수를 겨누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평화 파괴적 행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적의 무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국의 무력을 키우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우리는 이들을 전쟁으로 치닫는 길을 선택한 어리석은 사람들로 간주하지만 그들이라고 우리보다 ‘평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하지’를 덜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합의문에 적혀 있지 않은 이런 사실들은 거의 ‘역사적 쾌거’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중요하며, 바로 이점이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적 대응이 가져온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박정부도 대북정책에서 ‘플랜B’라는 게임체인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해야 한다. 즉 북한의 도발을 철저하게 응징하면서 동시에 신뢰를 기반으로 남북 간에 교류확대를 한다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더 적극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제 대북전파방송과 한국의 TV, 구글의 인공위성 함대를 통한 무선인터넷 등 북한에 합법적인 정보유입을 다른 국가들과의 협조를 통해 시작한다면, 남북대화의 질은 근본적으로 개선될 것이다.